02
19

만약 우리가 해피 뉴이어를 말할 수 있다면

서이현 x 한소원

 

 

 

 

 

 

 

 

 

 

 

 

 

 

 

이제 반도의 여름은 춥다. 따뜻하다 못해 더워서 땀을 질질 흘리던 계절은 어느새 종적을 감춘 지 오래였다. 칠월. 매미가 찌륵찌륵 울어대는 것이 거슬려 미간을 찡그리고 피부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손등으로 닦아내다가 결국 더위를 이겨내지 못하고 선풍기를 약풍으로 틀어 그 앞에 앉아야 할 때. 서이현은 백 퍼센트 오리털로 만들어 추위를 막아준다던 패딩을 입고 있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숨을 뱉어낼 때마다 뽀얀 입김이 허공에 피어오른다. 야. 서이현이 말을 뱉어내자 뭐요, 하고 대답이 돌아온다. 한소원은 통조림을 반쯤 깐 채로 성의 없이 대답하고 있다. 통조림 좀 아껴 먹으라고. 이 근처 대형마트부터 작은 슈퍼까지 다 털어서 이제 다른 지역으로 가야 한단 말이야. 한소원이 잠시 손을 멈춘다. 미간을 살짝 찡그리다가 다시 통조림을 까댄다. 끼릭끼릭, 단단히 용접되어있던 철이 강제적으로 벌어질 때면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났다. 그 사이로 한소원의 목소리가 묻어난다.

“이건 밥이 아니라 괜찮아요.”

“그러면 뭔데.”

“뭐가요.”

“황도.”

“간식이요.”

“네가 생각을 좀 해봐. 그게 말이 돼?”

“안 될 건 뭐예요.”

원래 발음해서 입 밖으로 뱉어내면 그게 말인 거예요. 이런 것도 알려줘야 해요? 한소원은 황도 통조림의 뚜껑을 다 따더니 몇 번이나 사용한 플라스틱 숟가락을 눈으로 벅벅 닦아낸다. 마냥 희었던 손가락 끄트머리가 붉게 물든다. 그냥 새 숟가락이나 포크 까서 쓰면 될걸. 왜 저걸 저렇게 벅벅 닦아서 쓰고 있는 건지. 서이현은 언제나 그랬듯 한소원이 못마땅하기 짝이 없었다. 야. 그러다가 동상 걸리면 어쩌게. 신경 쓰고 싶지 않았으나, 한소원의 손가락 끄트머리가 신경 쓰여 어쩔 수가 없었다. 목도리라도 두르라는 말을 무시하고 나가 한참을 싸돌아다니다가 감기에 걸린 것이 정확히 일주일 전의 일이었다. 덕분에 서이현은 유통기한이 다 지난 감기약이라도 먹이기 위해 사람 하나 없는 거리를 손전등 빛에 의존한 채 오랫동안 걸어 다녀야 했다. 약을 먹이고도 물을 계속 데워 유탄포에 넣어 몇 번이나 안겨주고 재우고서야 겨우 나은 감기다. 감기로도 그렇게 곤혹스러웠는데 동상에 걸린다고? 상상하기도 싫은 일이었다. 서이현이 미간이 좁아진다. 한소원의 손목을 잡는다.

“뭐요.”

“눈에 그렇게 막 손 넣지 좀 마.”

“또 왜 이러는데요.”

“야. 너가 동상이라도 걸려봐.”

“당신이 돌봐야죠.”

“그래. 내가 돌봐야지. 아니, 야!”

“귀 아파요.”

“내가 그걸 말하는 게 아니잖아.”

한소원은 눈을 깜빡이다가 곧 단단한 이로 인해 흠집이 조금씩 나 있는 플라스틱 숟가락으로 황도를 떠먹기 시작한다. 한쪽 볼이 빵빵하게 부푼다. 차마 다 삼켜지지 못한 설탕물이 입술 틈새를 삐져나와 턱을 타고 아래로 흘러내린다. 한소원은 옷이 아깝지도 않은 건지 연한 베이지색의 패딩 소맷자락으로 입가를 벅벅 닦아내고 있다. 서이현은 한소원의 행동을 보며 하고 싶은 많은 말을 식도 뒤로 삼켜내야 했다. 한소원이 제멋대로 구는 게 하루이틀 된 문제도 아니고, 별말 없이 넘어가는 게 시간 낭비가 아니라는 것도 아는데……. 왜 이리 짜증 나는 걸 참을 수가 없지. 손가락을 안으로 말아쥔다. 추위에 잘 움직이지도 않는 손가락을 말아쥐었다가 필 때면 미약한 따가움에 미간이 좁아졌다. 그는 결국 숨을 뱉어내는 것을 끝으로 감정을 참아낸다. 한소원이 통조림을 절반쯤 비웠을 때, 서이현은 벤치 옆에 두었던 가방을 들었다. 아래 묻어난 눈을 툭툭 털어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대충 짐을 싸고선 배낭을 멘다.

“다 먹었지.”

“아뇨.”

“그러면 가면서 먹어.”

“길 걸으면서 뭐 먹는 거 아니에요. 그런 것도 몰라요?”

“어차피 길에 아무도 없는 거 알잖아.”

“지금 개나 고양이 무시해요?”

“혹시 한 대 맞고 싶어?”

“때릴 수는 있고요?”

“오늘은 가능할 거 같아서.”

“그런 건 진작 말해요.”

한소원은 투덜거리며 항상 들고 다니는 크로스백을 들었다. 한 손에는 여전히 포크가 꽂혀있는 황도 통조림을 든 채였다. 서이현이 앞으로 발을 한 걸음 내디딜 때면 한소원은 뭐가 그리 귀찮은지 미적거리며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눈이 밟혀 눌릴 때면 작은 소리가 났다. 소음을 만들어내는 생명체라곤 이따금 보이는 얼어 죽지 않은 들짐승과 서이현 그리고 한소원뿐이었기에 그 작은 소리가 무척이나 크게 들려오곤 했다. 숨을 뱉어낼 때면 입김이 피어오르는 칠월의 겨울. 한소원과 단둘이서 남았다는 사실이 도저히 아직까지도 믿기지 않았으며 동시에 너라도 곁에 있어 혼자가 되지 않아 다행이라는 저열한 안도감이 들기도 했다. 한소원이 작금의 상황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서이현으로서는 알 방법이 없었다. 알 수 없기에 불안했고, 알 방법이 없기에 체념할 수 있었다. 한소원은 이 끝나지 않을 것같이 긴 겨울 속에 둘밖에 남지 않은 걸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그 의문을 문득 떠올릴 때면 서이현은 멀어지기 힘든 친숙하고 친밀한 우울과 가까워지곤 했다.

“넌 겨울 좋아해?”

“갑자기 무슨 소리래요. 이건.”

“궁금하니까 물어보는 거야. 세세한 건 따지지 좀 마.”

“그건 당신이 잘하는 거잖아요.”

“아, 진짜. 좋아하는지, 안 좋아하는지. 그거 말해주는 게 그렇게 어려워?”

“어려운 건 아닌데요.”

“근데 왜 그러는데.”

“그냥요.”

황도를 다 먹었는지 설탕물을 다 마신 뒤, 통조림을 대충 바닥에 내다 버린다. 그걸 주워 의미도 없는 쓰레기통에 버리는 것은 서이현의 몫이었다. 길에 그런 거 버리지 좀 마. 표면에 설탕물이 묻어난 통조림의 겉면에 손가락이 닿았을 때, 미적지근한 짜증을 참아내기 힘들었다. 끈적거리고, 철제 캔은 차갑기 짝이 없고, 그거에서 손가락을 아주 잠시 떼어내면 얇은 피부가 쭉 늘어지는 듯한 기분이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얕은 한숨을 연신 뱉어낸다. 설탕물이 묻지 않은 손은 패딩 주머니 안에 꽂아 넣는다. 넌 진짜 그게 문제야. 서이현의 말에 한소원은 어깨를 으쓱이며 손을 대충 털어낸다. 그러다가 곧 바닥에 한가득 쌓인 눈을 쥐어 체온으로 녹여내기 시작했다.

“안 추워?”

“차가운데요.”

“또 감기 걸리면 어쩌려고.”

“내가 걸리는 건데 뭐 어때서요.”

“네가 감기에 걸리면 내가 고생하잖아.”

“그건 뭐…….”

한소원은 눈동자를 데록데록 굴리다가 윗입술로 아랫입술을 내리누른다. 멋쩍음에 할 말이 없는 건 아닐 것이다. 그는 언제나 그랬듯 자신에게만큼은 지나치게 무관심했고, 무신경했으며 그렇기에 제멋대로 굴었다. 그러니 저러는 게 분명했다. 감기에 걸려도 어차피 내가 돌봐줄 걸 아니까. 병마를 이겨내는 과정에서 내가 얼마나 저를 위해 희생해도, 그로 인해 피곤해지는 건 딱히 상관없으니까. 어떻게 돼도 좋으니까. 그걸 직접 말하면 귀찮아질 게 뻔해서 저러는 거겠지. 서이현은 한소원의 생각보다 그를 잘 알고 있었다. 입술을 달싹이다가 결국 말하길 관둔다. 곧 눈이 내릴 것처럼 어두운 구름으로 가득 덮인 하늘, 눈이 잔뜩 쌓인 거리 한복판에서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대화를 나누는 건 사양이었다. 불어오는 바람에 모가 얇은 검은 머리카락이 허공에 넘실거린다. 너 진짜 귀찮아. 알기나 해? 서이현은 결국 누구를 뜻하는지 모를 말을 입에 담고선 다시금 발을 떼어냈다. 한소원은 별다른 말 없이 아까처럼 서이현을 따라 걸었다. 서이현의 발자국 위에 발을 얹는다. 추워요. 한소원의 말에 서이현이 대답한다. 원래 겨울은 추운 거야. 대답을 들은 한소원은 고개를 옆으로 기울인다. 차고 건조한 바람을 연신 맞은 입술이 잔뜩 부르튼 탓에 굳이 길어질지도 모를 대화의 시작을 혀에 올리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속으로 묻게 되는 것이었다. 지금은 겨울이 아니라, 칠월, 그러니까…… 여름인데 추운 게 이상하지 않냐고.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 게 당연한 의문을 입 밖에 내지 않은 채, 한소원은 멀어져가는 서이현의 뒷모습을 눈에 담는다. 그가 걸음을 멈추고 등을 돌린다. 야, 안 와? 나름 크게 소리 내어 말한 것 같았지만, 빼곡히 들어선 건물 틈새로 들이치는 바람 소리에 서이현의 말은 살라 먹혀 곧 사라졌다. 안 들리는데, 뭐 어쩌라는 건지. 입을 벌려 작은 목소리로 말하던 한소원의 미간이 좁아진다. 입술이 따가웠다. 날카로운 통증에 손을 위로 올린다. 소맷자락으로 입술을 문지른다. 통증이 뭉개짐과 동시에 손을 떼어낸다. 아주 옅은 색의 천에 얇은 실선과 비슷한 흔적이 남았다. 아무래도 입술이 찢어진 모양이었다.

 

 

 

 

서이현과 한소원은 빙하기를 맞이한 지구에 유일하게 남은 지성체다. 정확히 말하자면 전 인류가 아닌 대한민국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두 명이다. 그나마 사람이 몇 남아있을 때, 라디오의 주파수가 잡혔을 때, 마지막으로 들었던 뉴스에서 대한민국 근방 나라들은 전부 멸망했고 그 나라의 국민은 생을 다했다고 했으니 감히 전 인류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람이라 칭해도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서이현은 주파수도 잡히지 않는 라디오의 버튼을 연신 눌러대다가 결국 다시 가방에 그것을 넣는다. 한소원은 마트 카트에 아직 유통기한이 지나지 않은 과자나 통조림을 담으며 서이현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잠은 가구 코너에서 자요. 거기 침대 있던데. 침대에서 잘래요. 침대에 누워 이불을 덮어도 닥쳐오는 추위를 피할 수나 있을까? 코를 훌쩍인다. 야. 거기 추울걸. 한소원은 카트 안에 담긴 물건을 보다가 찢어진 입술을 느리게 떼어낸다.

“불 피우면 되죠.”

“그러다가 불나면 어쩌게.”

“따뜻할 거 같은데.”

“정신 나간 소리 말고.”

“바람이라도 피하는 게 맞잖아요.”

“그건 그런데…….”

“그렇죠?”

당신이 틀렸다는 듯 한쪽 입꼬리만 올려 웃는 모습이 밉살스럽기 짝이 없다. 서이현은 한소원과 눈을 맞추다가 고개를 옆으로 휙 돌린다. 네 마음대로 해. 어차피 다른 곳에서 자는 게 좋을 거 같다고 말해도 넌 여기서 잘 거잖아. 아니야? 한소원이 고개를 끄덕인다. 오랜만에 침대에서 잘 생각인데요. 침낭은 질렸어요. 바닥에서 자는 것도 허리 아파요. 슬슬 침대에서 자고 싶다고요. 철없기 짝이 없는 말이 그리 낯설지 않다. 오히려 한소원이 굉장히 의젓하게 상황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파악하고 있다는 듯이 말했다면 서이현은 눈 속에 파묻혀 있을 정신과 의사를 찾아다녔을 것이다. 변함없는 모습이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제발 철 좀 들으라고 말해야 할지……. 서이현의 시선이 한소원에게서 카트로 향했다. 그거 두고 가야 해. 계단으로 가야 하니까. 알지? 그러자 한소원은 카트 안을 헤집기 시작했다. 과자 봉지를 몇 개 품에 안아 든 채로 서이현을 바라본다.

“이건 가지고 올라갈래요.”

“침대 위에서 먹으려는 거 아니지.”

“그럴 건데요?”

“침대 위에선 뭐 먹는 거 아니라고.”

“백화점 침대인데요.”
“침대는 침대잖아.”

“어차피 하루 자고 말 거잖아요.”

말문이 막혀 입술만 달싹인다. 아니, 그게, 그렇긴 한데. 분명 그런데……. 왜 한소원에게 저런 말을 들으니까 짜증이 나는 거지? 손가락을 안으로 말아쥔다. 한 대 쥐어박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막상 쥐어박지 못할 거라는 것은 서이현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시선을 살짝 아래에 둔다. 네 마음대로 해라. 어차피 마음대로 할 거잖아. 퉁명스럽게 말한 뒤, 입술을 비죽 내미는 모습을 지켜보던 한소원은 서이현에게 등을 돌린다. 백화점 가장 중앙에 있는 에스컬레이터를 계단인 것처럼 한 칸 한 칸 걸어 올라간다. 그 뒷모습을 지켜보던 서이현은 입을 벌린다. 야! 가구 코너가 몇 층에 있는데! 건조하기 짝이 없는 입술은 벌어지며 갈라진다. 날카로운 통증에 순간 미간이 좁아진다.

“에스컬레이터 옆에 안내판 세워져 있잖아요.”

“말해주면 어디가 덧나?”

“그렇진 않은데요.”

“그러면.”

“귀찮아요.”

“고작 그게 귀찮으면 숨은 어떻게 쉬고 사는 거야.”

머리카락을 마구 헤집다가 결국 얕은 한숨을 뱉어낸다. 입김이 피어오르는 것을 보다가 고개를 아래로 떨군다. 검은색의 머리카락이 뺨을 간질인다. 한소원은 서이현에게 두었던 시선을 거둔다. 서이현은 에스컬레이터를 오르는 한소원을 바라보다가 그의 모습이 사라졌을 때,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는 제 몫의 카트를 끌고 백화점 안을 돌아다녔다. 식품 코너에 있던 카트를 낑낑거리며 계단을 오른 탓에 팔이 아려왔다. 왼손으로 오른쪽 손목이나 팔목을 주무르다가 손을 아래로 떨군다. 서이현은 넓은 백화점을 걸으며 생활에 필요할 법한 물건을 카트 안에 담았다. 그러면서 그는 앞으로의 삶에 대해 생각하고 고민했다. ……내년이 올까? 문득, 이따금 떠오르는 생각이 머릿속에 퍼져나갈 때면 걸음을 멈추고 아무도 남지 않은 풍경을 눈에 담곤 했다. 멍하니 입을 떼어내지 않고, 움직이지도 않은 채로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서이현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많은 것들을 이해할 수 없었고,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가장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것은 아마도…… 한소원과 자신만이 남은 지금이다. 한소원이라도 있어서 다행이었다. 동시에 한소원만 남아있었기에 외롭기 짝이 없었다. 금방이라도 꺼질 것처럼 여린 체온이 맞닿을 때는 색이 짙고 깊은 외로움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으나, 서로를 마주 보고 대화 같지도 않은 대화를 나눌 때면 그 외로움이 갑작스러운 눈보라처럼 세차게 밀려와 서이현을 뒤덮곤 했다. 완벽한 타인과 함께했어도 이보다 더 외롭진 않았을 것 같았다. 아니, 그랬을 거다. 한소원은 정말 최악이니까. 무심하고, 무던한 거 같은 주제에 까탈스럽기 짝이 없고. 협력심이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 없고. 친절하지도 않고. 귀찮게 굴고. 다, 전부, 하나도 빠짐없이 최악인데……. 찢어진 입술을 잘근잘근 씹는다.

“뭐해요.”

한소원은 소리 없이 서이현에게 다가와 그의 어깨를 툭툭 친다. 서이현의 몸이 눈에 띄게 움츠러들었다. 놀랐잖아! 신경질적인 말에 한소원이 헛웃음을 터트린다. 어차피 여기에 우리 둘밖에 없어요. 동물이 말을 걸 일도 없고. 어차피 나밖에 없는데 뭘 그렇게 놀라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뱉어내는 말에 짜증이 일었다. 짜증을 낸다 해도 한소원은 서이현이 유별나게 군다고 오히려 짜증스레 대답할 것이다. 결국 카트 손잡이에 얹었던 손을 떼어낸다. 올라가기나 하자. 서이현의 말에 한소원은 어깨를 으쓱인다.

“그러려고 했어요.”

“한 번이라도 좀 조용히 가자. 어?”

“직접 데리러 온 사람한테 할 말이에요. 그게?”

“유탄포에 물 넣어달라고 온 거잖아. 지금”

“잘 아네요. 빨리 올라가서 해줘요.”

뻔뻔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 이제는 낯설지 않다. 오히려 저렇게 굴지 않으면 한소원이 아니라고 생각할 정도다. 순순히 따르는 것은 얼마 남지도 않은 어쩌면 남아있다고 하기도 낯 뜨거울 자존심 탓에 서이현은 입을 열었다. 넌 진짜 나한테 고마워해야 해. 알아? 나 없었으면 넌 분명 굶어 죽었을 거야. 아니, 얼어 죽었을지도 모르지. 너는 유탄포에 물을 잘 넣지도 못하고. 밥이라곤 황도 통조림만 먹으려고 하고. 잔뜩 쌓인 흰 눈 위에서 뒹굴다가 감기에 걸리잖아. 그러니까, 내가 아니었으면 죽었을걸. 한소원은 서이현이 말하는 내내 시큰둥한 표정으로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당신이야말로 내가 없었으면 죽었을걸요. 서이현의 걸음이 점차 느려진다. 무어라 반박하고 싶었지만, 마땅히 떠오르는 말이 없었다. 애처럼 아니라고 끝에 따라붙는 이유도 대지 않고 완벽하게 부정하고 싶었다. 그런데도 도저히 입을 떼어낼 수 없었다. 서이현은 홀로 살아갈 수 없는 인간이니까. 외로움과 고독을 떠안고 아무도 없는 거리를 평온하게 나돌아다닐 사람이 못됐으니까. 한소원에게 말하지는 못하지만, 말할 생각조차 없지만, 만약 한소원이 없었더라면 서이현은 가로수에 목을 매 죽었을 것이 분명했다.

“네가 뭐라고.”

“뭐가요.”

“너 없어도 변하는 건 없거든.”

“그렇겠죠.”

“난 너 없이도 잘 살 거야.”

스스로 다짐하듯 뱉어낸 말에 한소원은 그렇겠죠, 하고 또 같은 말을 뱉어냈다. 아무래도 좋다는 듯이 무신경하게 무던하게 말한다. 한소원은 항상 뭐가 저렇게 쉬운 걸까. 서이현은 모든 것이 어려웠고, 신경 쓰여 어떻게 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곤 했는데. 어떨 때는 꼴 보기도 싫은 쟤가 거슬릴 정도로 눈에 밟히곤 했는데……. 한소원은 그런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겠지. 코를 훌쩍인다. 아무래도 찬 바람을 너무 오랜 시간 맞은 듯했다.

“울어요?”

“죽을래?”

“우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니에요.”

“진짜 한 대 때리고 싶다. 너.”

가구 코너는 백화점 팔 층에 있었다. 팔 층까지 걸어가는 내내 서이현은 침묵을 지켰고, 자연스럽게 한소원 또한 입을 닫은 채 걷기만 했다. 팔 층에 다다르고 서이현은 가방을 내려두었다. 안에서 부루스타와 부탄가스를 꺼낸다. 한소원은 서이현에게서 멀어져 백화점 사이사이를 돌아다니다가 적당한 크기의 냄비를 가져왔다. 여기다가 물 끓여요. 밑바닥 다 탄 냄비는 이제 좀 버리자고요. 냄비를 받아 들고 투덜거린다. 그 냄비가 누구 때문에 탄 건데. 비닐봉지를 뜯어 얼려두었던 물을 냄비 안에 넣는다. 부루스타 위에 올리고 불을 붙인다. 이제는 낯설지 않은 어둠 속, 피어오른 주홍색의 빛이 한소원과 서이현의 흰 피부 위에 내려앉는다. 한소원은 품에 유탄포를 안은 채, 서이현의 맞은편에 쪼그려 앉는다. 서이현은 그가 들고 있는 유탄포를 보며 눈을 깜빡인다. 저게 망가지면 어쩌지. 하나 더 구해놔야 하나. 물이 끓으며 김이 피어오른다.

“물 끓어요.”

“더 끓여야 그나마 뜨거운 거 길게 가.”

“어차피 식다 못해 얼잖아요.”

“잠들 때까지만이라도 따뜻하면 좋잖아.”

“그렇긴 해요.”

부글부글 끓는 물을 유심히 보던 한소원이 다시금 느리게 입을 떼어낸다. 크리스마스트리 진열되어있는 거 봤어요? 고개를 젓는다. 본 적 없는데. 서이현은 백화점에 들어서고 카트를 찾아 끄는 내내 당장 필요한 물건들을 찾는 것에 급급했다. 크리스마스트리니 산타 인형이니 하는 것들은 그에게 큰 관심을 끌지 못했다. 통조림은 허기를 채우는 데에 도움을 주지만, 크리스마스트리는 무엇 하나 도움이 되는 것이 없지 않은가. 낭만이 없네요. 영화 보면 이럴 때, 더 낭만 있게 사는 거 몰라요? 영화를 자주 보지도 않는 주제에. 혀를 찬다. 한소원이 들고 있던 유탄포를 뺏어 든다. 그것의 뚜껑을 열고 냄비 안에 담긴 물을 그 안에 넣는다. 막상 내가 트리 챙기려고 하면 뭐라고 할 거잖아. 한소원은 딱히 부정하지 않았다.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따뜻해요?”

“따뜻하다 못해 뜨거운데.”

“그러면 됐어요.”

한소원은 서이현이 유탄포의 뚜껑을 닫은 뒤에야 그것을 품에 안았다. 후끈한 열기에 차게 식은 살이 따끔거린다. 유탄포를 안은 채로 침구가 있는 쪽으로 걸어간다. 서이현은 제 몫의 유탄포에 물을 다 넣고 불을 끈 뒤에야 한소원이 걸어간 길을 뒤따라 걸어간다. 침대가 규칙적인 간격을 맞춰 놓인 걸 보다가 한소원의 옆 침대에 눕는다. 다른 침대 많잖아요. 서이현은 한소원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유탄포를 껴안은 채, 이불을 덮고선 천장에 시선을 둔다. 야. 한소원. 퍽 오랜만에 그의 이름을 부른 거 같았다. 한소원은 왜요, 하고 대답할 뿐 서이현이 제 이름을 부른 것에 대해 이유를 묻지는 않았다. 몸을 뒤척일 때마다 천이 스쳐 작은 소리가 났다.

“내년이 올까.”

내년이란 무언가 아득하고 추상적인 개념처럼 남은 지 오래였다. 당장 살아가는 것도 급급했다. 아침을 맞이할 때면 눈이 잔뜩 쌓여 밖에 나가지도 못한 채, 생을 마감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숨쉬기 힘들 때도 분명히 있었다. 서이현은 불안했다. 한소원이 죽을까 봐. 그리고 자신이 죽을까 봐. 아무것도 남지 않은 지구에서 의미도 없이 생을 연명한다는 게 의미가 없을까 봐. 모든 것이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한소원은 그의 말에 몸을 돌려 누워 서이현을 바라본다. 당신은 생각이 너무 많은 게 탈이에요. 생각 좀 그만하면 안 돼요?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헛웃음이 새어 나온다. 차라리 내가 한소원처럼 아무 생각 없이 지낼 수 있었더라면, 이제는 친밀하게까지 느껴지는 우울을 잊어낼 수 있었을까. 손을 얼굴에 얹는다. 밖에 널린 얼음처럼 차가운 살이 피부에 닿는다.

“……맞아. 네 말대로 난 생각이 조금 많은 거 같아.”

그런데 어쩌겠어. 원래 이렇게 태어난 거 같은데. 이런 이야기 할 사람 이제 너밖에 안 남았어. 이럴 때는 그냥 좀, 사실 말하지 말고. 그냥 공감을 해주던가. 이해 못 하겠으면 대충 어울리는 척이라도 해주던가. 그렇게 해줘. 어? 목소리가 형편없이 잘게 떨린다. 한소원에게 가장 보이고 싶지 않던 모습과 뱉어내고 싶지 않은 말이 잘 정돈되지도 못한 채 튀어나온다. 완벽하게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그 뒤에 따라오는 것은 후련함이 아닌 후회다. 입안의 여린 살을 잘근잘근 씹는다. 아릿한 통증에 미간이 좁아진다. 미안하다고 말할까. 아니, 난 근데…… 언제나 잘못한 거 하나 없는데……. 몸을 뒤척인다. 얇고 긴 머리카락이 건조한 피부를 간질인다. 어둠에 익숙해진 시야로 보이는 것은 한소원의 눈동자다. 쟤는…… 빛 한 점 없는 곳에서도 눈동자는 반짝거리네. 서이현과 한소원은 그렇게 한참 눈을 맞췄다.

“뭘 봐요.”

한소원이 짜증스레 말하기 전까진 그랬다. 그는 한소원의 말에 등을 돌려 눕는다. 저런 애한테 뭘 말하려고 한 내 잘못이지. 내가 다 잘못했네. 뭘 바란 것도, 헛된 기대를 한 것도, 이럴 때는 그래도 위로를 해주지 않을까 내심 생각한 것도 다 잘못처럼 느껴졌다. 손가락을 안으로 말아쥔다. 한소원 저건 멍청이야. 그냥 바보고. 매일 분위기 좀 읽으라고 그러면서 지는 분위기에 어울리는 법도 모르고. 욕같지도 않은 욕을 속으로 하고 있을 때, 한소원이 말을 꺼낸다. 그렇게 내년이 중요해요? 그냥 시간일 뿐이잖아요. 미래라는 거. 나중의 일을 생각해봤자 지금 당장 좋은 게 생각나긴 해요? 분명 당신은 내년에는 어디서 지내야 할까. 먹을 만한 음식이 남아있긴 할까. 그런 생각이나 할 게 분명한데. 그가 이렇게 길게 말하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답답했던 걸까. 아니면 이번 기회에 서이현의 안 좋은 버릇을 고쳐놓겠다는 걸까. 한소원의 말이 어떠한 마음과 저의에서 시작되었는지 서이현이 알 방법은 없다.

“내년이 뭐라고 그러는 건데요.”

“뭔가, 달라질 거 같잖아. 새해라는 거 하나만으로.”

“뭐, 눈이 녹고 꽃이 필 거 같다고 말할 건 아니죠?”

“그러면 안 돼?”

“멘트 진심 구려요.”

“어쩌라고.”

“진짜 별로다.”
 한소원은 서이현에게서 시선을 떼어낸다. 천장을 보며 눈을 느리게 감았다가 뜬다. 새해가 뭐라고 저러는 건지. 서이현은 좋게 말해서 섬세하고 예민했으며, 솔직하게 말하자면 귀찮은 사람이었다. 평범한 대화를 나눌 때보다 소리를 높여 논쟁을 벌일 때, 더 생기가 넘쳐 보이는 사람이기도 했다. 참으로 안타깝게도 한소원은 서이현과 궤를 다르게 하는 사람이었다. 무던한 듯 예민했지만 티를 내진 않았으며, 타인을 귀찮게 하지 않았고 귀찮은 일을 겪고 싶지도 않아 했다. 혼자 있어도 그리 외로움을 타지 않는 사람이기도 하다. 하나하나 따져보면 서이현과 완벽하게 정반대에 서 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자각하게 되는 것이었다. 얕은 한숨을 뱉어낸다.

“이해할 수가 없네.”

혼잣말처럼 작게 웅얼거린다. 들짐승의 울음도 사람이 만들어내는 소음도 없는 건물 안이었기에 한소원이 내뱉은 말은 서이현의 귓등에 닿을 수밖에 없었다. 나도 너 이해 못 해. 누군 이해할 수 있는 줄 아나. 짜증스레 대답하곤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쓴다. 차라리 이렇게 숨 막혀 죽으면 좋겠다. 여름에 선풍기를 틀고 자면 죽는다는 괴담을 떠올리듯 시답지도 않은 생각을 하며 눈을 질끈 감는다. 한소원은 헛웃음을 터트리며 제 품에서 꺼져가는 온기를 느꼈다. 유탄포에 든 물이 이불에 스며든 냉기를 잔뜩 머금고 있는 게 분명했다. 내년은 어차피 오는 거라고요. 싫든, 좋든요. 밤에 눈을 감고 아침에 눈을 뜬다는 행동을 이백 번 하면 내년하고도 시간이 조금 지나있을걸요. 한소원의 말이 점차 작게 들린다. 발음이 뭉개지는 거 같기도 하다. 한소원이 잠에 서서히 파묻혀가는 걸까. 어쩌면 자신이 잠에 발을 들였고, 그 안으로 녹아 가는 걸지도 모르겠다. 점차 눈이 감겼다. 이대로 잠들 듯이 죽어 그렇게 생을 끝내고 싶다. 끝나지 않는 겨울과 함께 찾아와 지독한 감기처럼 떨어져 나갈 기미가 없는 우울과 고독을 끊어내는 방법은 그것밖에 없을 것 같다. 아니, 그것밖에 없다. 한소원은 자신의 감정이나 고독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불에 얼굴을 완전히 파묻는다. 야. 나는 네가 날 조금도 이해 못 하니까, 그래서, 둘이 있어도 꼭 혼자 있는 거처럼 외로운 거 같거든. 근데 너 없으면 좀 더 외로울 거 같아서 그건 또 싫어. 넌 이 말 들으면 역시 귀찮다고 투덜거리겠지. 진짜 상상만으로 짜증 난다. 혀 위까지 올라온 말을 애써 씹어 삼킨다. 짓뭉개지고, 으깨지고, 찢어진 말의 파편이 식도와 위를 긁고 헤집으며 곧 사라진다. 의식이 점차 멀어진다. 낯설지 않은 완전한 어둠이 망막 위에 내려앉는다. 아침에에 깨우지 마아. 서이현이 뭉개진 발음으로 말을 길게 늘이며 말한다. 어차피 당신이 저보다 더 일찍 일어날걸요. 아니더라도 안 깨울 거니까 그냥 잠이나 자요. 이상한 말 하지 좀 말고.

 

모든 것이 흰 땅 위에서 서이현은 한소원을 마주 보고 있었다. 불어오는 바람에 흩날리는 하늘색의 머리카락이 이전보다 상한 거 같다는 생각을 문득 하면서 그와 눈을 맞췄다. 마냥 흰 눈에 반사된 빛이 그의 망막에 맺힌다. 눈동자가 반짝인다. 그 반짝임 속에는 서이현이 담겨있다. 서이현은 그것을 바라보았고, 오로지 자신만 담겨있는 그 눈동자에 저열한 만족감을 느낀다. 도저히 이유를 알 수 없어 퉁명스레 무어라 말한다. 그러면 한소원이 미간을 찡그렸다. 그걸 보며 서이현은 한참 웃었다. 통쾌했고 유쾌했다. 한소원이 서이현을 바라보며 입술을 달싹일 때, 그는 눈을 떴다. 차게 식은 물이 가득 든 유탄포가 침대의 끄트머리에 놓여 있었다. 손을 위로 올려 눈가를 비빈다. 야, 왜 안 깨웠어……. 잔뜩 갈라진 목소리에 차마 지워내지 못한 잠의 수마가 담겨있다.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제 체온을 앗아가 따뜻해진 침대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눈을 비비던 손으로 마른세수를 연거푸 한다. 숙이고 있는 고개를 겨우 올린다. 야. 왜 대답이 없는데. 고개를 옆으로 돌린다. 한소원이 누워있어야 할 침대에는 그가 껴안고 잔 유탄포밖에 없었다.

“한소원?”

서이현은 멸망한 이후로 자신과 함께한 남자의 이름을 발음했다. 아득히 멀어진 채로 있을 것만 같았던 의식이 제자리를 찾기 시작한다. 서이현은 침대 밑으로 발을 내디딘다. 벗어두었던 신발을 구겨 신고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긴다. 야. 한소원. 너 어디 있는데! 소리를 크게 내며 그의 이름을 연신 불러댄다. 보폭이 넓어지고 걸음이 점차 빨라진다. 널브러진 물건에 발이 걸려 넘어진 뒤에야 서이현은 패딩 주머니에 항상 넣고 다니는 손전등을 꺼내 버튼을 눌렀다. 한소원이 보이지 않는다. 아래로 내려간 걸까. 배가 고파 무언가를 먹으러 지하 일 층으로 간 것일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라면, 만약에, 상상도 해본 적 없는데…… 한소원이 자신을 떠난 거라면? 불안이 목덜미에 내려앉아 피부를 간질인다. 손가락 끄트머리가 점점 차게 식어만 간다. 입술을 벌릴 때마다 얇게 세공된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입술이 또 찢어진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 얄팍한 통증은 서이현에게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의 서이현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한소원이 사라졌다는 사실과 어쩌면 버려진 걸지도 모르는 이 현실을 받아들이는 거였다. 숨이 점차 가빠진다. 손가락을 안으로 말아쥔다. 겨우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발을 떼어낸다.

“야아…… 어디 있는데…….”

불안은 이제 그의 그림자가 되어 서이현과 함께했다. 가전제품이 즐비 되어 있는 코너를 거의 다 돌아보았을 때, 가장 구석진 곳에서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먹을 것을 찾아 안으로 들어온 들짐승일까. 아니면 한소원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운 좋게 살아남은 생존자일지도 모른다. 서이현은 처음으로 저 소리를 만들어낸 존재가 한소원이었으면 했다. 한소원은 최악이다. 구석진 매대로 걸어가며 서이현은 마른침을 삼켰다. 제멋대로 굴고, 멋대로 사람을 흔들어두고선 어떠한 말도 남기지 않고 떠나버릴 것처럼 행동하고……. 과거에도 지금도 어쩌면 미래에도 한소원이 없는 삶을 바랐으나 정말로 그가 없어진다는 걸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은 없는데. 자기는 내가 없어도 된다는 듯이 말하고. 아무래도 좋다는 듯이, 금방 사라질 것처럼 구는 게 한소원이 최악이라는 많은 이유 중 하나다.

“뭐예요.”

봐. 누구는 바닥에 넘어져 가면서 찾고 있었는데 손전등 빛 하나 비추었다고 짜증스레 말하는 거. 저래서 한소원이 최악이라는 거다. 내가 어쩌다 저런 애랑 엮여서. 혀를 찬다. 거기서 뭐 해. 손전등을 아래로 향하게 기울인다. 자잘한 물건들이 바닥에 잔뜩 널브러져 있다. 서이현은 한숨을 뱉어내며 바닥에 쪼그려 앉는다. 촛불, 크리스마스트리를 장식할 때 사용되는 오브제. 케이크나 빵을 잘라낼 때 사용하는 빵칼이 어수선하게 질서도 없이 놓여 있다. 이런 건 왜 꺼낸 거야. 도움도 안 되는 거잖아. 차라리 그 시간에 통조림이나 물 같은 거나 찾으러 가지. 마음에도 없는 말이 길게 이어지다가 끊긴다. 어떠한 말도 없는 한소원을 바라보며 묻는다.

“왜 말이 없어.”

“짜증 나서요.”

“짜증은 내가 내야 하는 거 아니야?”

“당신이 왜요.”

“야, 내가 너 사라져서…….”

얼마나, 놀랐는데. 말이 길게 늘어진다. 서이현은 고개를 푹 숙였다. 겨우 잊고 있던 불안이 스멀스멀 발목을 타고 위로 기어 올라온다. 그는 얼굴을 손으로 비비다가 곧 손을 아래로 떨군다. 어디 갈 거면 깨워서 말이라도 하던가. 서이현의 말에 한소원이 어깨를 으쓱인다. 당신이 깨우지 말라면서요. 깨우지 말래서 안 깨운 건데 왜 뭐라 하는 건데요. 깨워도 뭐라 할 거잖아요. 무어라 마땅히 대답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서이현은 손전등을 고쳐 쥐고선 입을 떼어냈다.

“그래서 뭐 하는데.”

“당신 좋을 일이요.”

“이게 뭐가 좋은 일이야?”

“신년맞이 해주는 거잖아요.”

“지금 여름인데?”

“눈 오는 거 보면 겨울인데요.”

“칠월이잖아.”

“의미가 없잖아요. 의미가.”

“그것보다 밖에 눈 와?”

“네.”

“너 혼자 밖에 나갔지.”

“전 법적으로 성인인데 뭐가 문제에요.”

뾰로통한 표정으로 한소원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휙 돌린다. 애도 아니고 왜 저러는 건지. 한소원은 중얼거리며 바닥에 놓인 물건들을 품에 안아 든 채로 일어섰다. 어디가. 서이현의 말에 한소원이 어둠을 바라본다. 저어기 있는 재고 떨이 판매 코너요. 서이현은 한소원의 뒤를 따라 걸었다. 한소원이 귀찮다고 할 일이나 하러 가라고 했지만, 그 말은 가볍게 무시했다. 그는 여름에는 잘 팔리지 않을 것 같은 악성 재고 제품으로 가득한 매장에 들어간다. 여기 손전등 빛 좀 비춰봐요. 한소원의 말에 서이현은 투덜거리면서도 한소원이 가리키는 곳을 손전등으로 비추었다. 구석진 곳에 놓인 트리에 오브제를 다는 한소원을 본다. 뭐 하는데. 한소원은 서이현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로 대답한다.

“크리스마스 기분이라도 내면 당신의 그 지긋지긋한 우울도 조금은 사라지겠죠.”

“그거랑 내 우울이랑 뭔 상관이 있는 건데.”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며칠이 지나면 새해잖아요. 그것도 몰라요?”

“이런 곳에서 싸우고 싶은 건 아니지?”

“……이렇게 바보일 줄은 몰랐는데.”

오브제를 걸던 손이 멈춘다. 한소원은 그제야 서이현을 바라본다. 며칠 뒤에 새해인 것처럼 인사하면 기분이라도 나겠죠. 어차피 눈이 펑펑 내려서 풍경은 겨울 같고, 불어오는 바람은 차가운데. 비슷하잖아요. 겨울이랑. 당신이 말한 새해랑. 시선을 아래로 떨군다. 답지도 않은 짓을 하고 있어. 짜증 나게. 평소처럼 비웃기라도 하던가. 그러면, 차라리, 완전히 놓을 수나 있는데……. 아무래도 지금 서이현은 한소원이 최악인 이유를 다시 하나 찾은 듯했다. 손가락을 안으로 말아쥔다. 안 그래도 찢어진 아랫입술을 이로 잘근잘근 씹어댄다. 야, 이…… 멍청아. 그런 거로 새해 기분이 날 리가 없잖아. 서이현은 한소원에게 다가간다. 그의 손목을 잡고 매장의 밖으로 이끈다. 한소원이 무어라 말하긴 했지만, 귀에 들어오진 않았다. 대신 서이현은 무언가를 생각했다. 끝나지 않을 거 같은 겨울. 겨울의 껍데기를 뒤집어쓴 채로 반도의 땅에 내려앉은 여름. 이 안에서 서이현은 한소원과 함께 내년을 맞이하는 상상을 해보았다. 내년에는 꽃이 필지. 아니면 말라 죽어버린 고목 사이사이를 걸으며 눈을 맞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서이현은 꽃이 피든, 고목 사이를 걷든, 휘날리는 눈발을 맞든, 내년을 맞이하면 한소원에게 말할 것이다. 너는 지긋지긋했고, 앞으로도 지긋지긋할 거고, 정말 최악이지만, 올 한 해도 잘 부탁한다고. 해피 뉴이어, 라고 말할 거다. 그러면 넌 뭐라 대답할까? 서이현이 의문을 머금음과 동시에 걸음을 멈추자 그의 등에 부딪힌 한소원이 말한다. 뭐해요. 안 걷고. 쟤는 분명 해피 뉴이어라는 말을 들어도 알겠으니까 잘 곳이나 찾아보라고 하겠지. 고개를 돌려 한소원을 바라본다. 완벽하게 만연한 어둠 속에서도 반질거리는 눈동자를 유심히 보다가 입을 떼어낸다. 그냥. 실없는 대답에 한소원이 고개를 옆으로 기울인다. 그 모습에 꿈속에서나 느꼈던 유쾌한 기분이 모습을 드러내고 곧이어 제 속에 내려앉았다. 서이현이 입술의 끄트머리를 올려 웃는다. 말간 미소에 한소원은 입술을 떼어냈다가 닫기를 반복했다. 그러다가 겨우 입을 완전히 떼어낸다.

“그렇게 웃지 좀 마요. 뭐가 좋다고 웃어요. 그러는 거 바보 같아요.”

 

Copyright ⓒ 2025 @Shinoumide All right reserved.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구를 닮은 네가 싫어  (0) 2025.03.31
정해진 무덤 속으로  (0) 2025.03.25
오로지 당신의 수양딸로서  (0) 2025.02.01
겨울 유희  (0) 2025.01.22
박복한 삶  (0) 2025.01.11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