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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온실 속 프리지아

다자이 오사무 x 아리아

 

 

 

 

 

 

 

 

 

 

 

 

 

 

 

아리아는 처음으로 상복이라는 걸 맞춰보았다. 상복을 맞춘 곳은 미세스 홉킨스가 운영하는 가게로 질 좋은 인도산 천을 이용하여 드레스를 만드는 샬롱으로 유명했다. 데뷔탕트 때 입었던 드레스도 이곳에서 맞췄었는데. 탄탄하게 묶인 리본을 풀어 내리며 아리아는 멀다면 멀고 멀지 않다면 멀지 않은 과거를 떠올린다. 다 풀어 헤쳐진 끈을 엉성하게나마 정리하고서 상자 안에 든 상복을 꺼낸다. 검은 벨벳과 레이스로 이루어진 드레스는 품이 딱 맞았다. 주름이 생기는 걸 개의치도 않고 드레스를 품에 안는다. 얕은 숨을 내뱉고 들이쉴 때면 홉킨스 부인이 뿌리는 독한 향수의 향기가 코점막에 엉겨 붙었다. 가야겠지. 가기 싫긴 하지만, 그래도…… 가는 게 맞겠지? 까슬한 레이스가 얇은 피부를 간질인다. 얼굴을 드레스에 비비다가 떼어낸다. 아리아의 시선은 맞은편에 걸려있는 그림에 닿아있다. 면이 거친 캔버스 안에는 어린 아리아가 있다. 그리고 아리아의 양아버지는 그녀의 둥근 어깨에 손을 얹은 채로 뒤에 서서 옅은 미소를 입에 머금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인물을 따라 움직인다. 양아버지의 옆에 선 남자의 곁에는 한 여인이 있다.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다. 그리고 아리아는 한 소년에게 시선을 둔다.

“……다자이.”

그것은 언제나 익숙한 이름이라기엔 어딘가 굴곡지고, 낯선 단어라기엔 매끄럽게 발음되었다. 오래전에 그려낸 그림이라 그런지 캔버스 안에 다자이 오사무는 앳돼 보였고, 유순한 미소를 입에 머금고 있었다. 셔츠 깃 사이로 언뜻 보이는 흰 붕대를 볼 때면 아리아는 저도 모르게 제 목을 매만지곤 했다. 마른침을 삼킨다. 양아버지가 했었던 말을 뒤늦게 다시 떠올리고 곱씹는다. 아리아. 다자이 기억하지? 네 소꿉친구 말이야. 그 아이를 거둬준 내 친구가 죽었다니 장례식에 갈 준비를 하렴. 장례는 일주일 뒤에 열릴 거고, 네 상복은 홉킨스 부인에게 부탁했단다……. 그의 표정은 조금 착잡해 보였다. 이따금 다자이를 동정하는 듯한 말을 내뱉기도 했다. 걔도 안 됐지. 자기를 거둬준 유일한 사람을 잃었으니. 아리아는 그 말을 듣고 어떠한 대답도 하지 못했다. 치맛자락을 손에 쥐고서 고개를 아래로 떨구자 양아버지는 마음씨가 여린 제 딸이 다자이를 걱정하는 줄 알고 그녀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내가 후원을 해줄 생각이니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에 그녀는 한참이나 입술을 떼어냈다가 닫기를 반복했다.

그때 아리아는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식은땀을 닦아내고 싶었다. 거울을 보지 않았음에도 제 낯빛이 파리하게 질려있을 거란 걸 쉬이 예측할 수 있었다. 입술을 달달 떨며 아버지, 아버지하고 그를 부른다. 남자는 딸을 품에 안고 등을 토닥여주었다. 이리도 마음이 약해 어떻게 살아가려고. 아리아는 눈을 질끈 감았었다. 아버지. 그게 아니에요. 저는 다자이가 불쌍해서 이러는 게 아니에요. 전 다자이가 무서워서 이러는 거예요. 걔를 만나는 것도, 걔가 있을 그 저택에 가는 것도, 지하 육 피트 어쩌면 그보다 더 아래에 묻힐 남자의 마지막을 배웅해주기 위해 가는 것조차 무서워요. 떠오르는 생각을 입 밖에 내는 것도 두려워 아리아는 제 양아버지의 품에 몸을 기댔었다. 그녀는 지금도 끌어안고 있는 드레스가 마치 이 상황에서 구해줄 무언가라도 되는 것처럼 굴었다. 주름이 진다고 한들 장례식에 가지 않아도 되는 게 아닌데도. 레이스가 다 찢어져 보기 흉하더라도 가야만 하는데. 아리아는 상복을 수선하지도 못할 정도로 찢어내고 망가트리면 그 상황을 피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는 단순히 근거가 없는 바람이라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아리아는 소망한다. 그가 꽤 오랫동안 교류조차 하지 않았던 소꿉친구인 자신을 잊었기를. 기억에서 지웠기를. 어쩌면, 일평생 만나지 않기를. 마치 성실하고 헌신적으로 신을 믿는 신자처럼 손을 가지런히 모은다. 그리고 그 손에 이마를 댄다.

“저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아리아는 나지막이 말을 내뱉는다. 그녀의 방에는 양아버지가 있지 않으며, 수발을 드는 사용인조차 존재하지 않는데도. 누가 들을까 무서워 아주 작은 목소리로 비밀을 속삭이듯 말한다. 건조한 공기 탓에 퍼석하게 마른 입술이 갈라진다. 얕은 통증에도 아리아는 미간을 찡그리지 않았다. 그녀에게 고통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리고 고통보다 더 두려운 것도 존재한다. 감고 있던 느리게 뜬다. 그림 속 다자이는 아리아를 바라보며 미소를 머금고 있다. 자신보다 한참은 작은 소년이 그것도 그림 속에서나마 존재하는 과거의 잔재를 두려운 건 다자이가 말했던 것처럼 내가 예민해서일까. 아니면 저 소년이 다자이기에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아리아는 알 수 없었다. 이해하려고도 해보았다. 납득하려고도 해보았다. 다자이를 피해 본 적도 있다. 하지만 지독한 병 같은 두려움과 공포는 떨어져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제발, 제발…….”

아리아는 신을 믿지 않았음에도 기도한다. 아리아가 거주 중인 나라의 사람들은 대부분이 매일 아침 성당에 갈 정도로 독실한 크리스천이다. 하지만 아리아는 신을 믿지 않는다. 이는 다자이의 영향이었다. 다자이는 어릴 적부터 지독한 염세주의자였고 실존하지 않고 실존했다는 명확한 증거조차 없다시피 한 상징적 존재를 헌신적으로 믿는 걸 이해하지 못했다. 신이 있었다면 전쟁이 나지 않았겠지. 그는 손에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 책을 든 채로 말했었다. 아리아는 그때 다자이의 저택 정원에 앉아 화관을 만들고 있었다. 반쯤 다 만들어진 화관에 두었던 시선을 다자이에게로 돌리면 소년은 소녀와 시선을 맞추고선 아주 부드럽고 유순하게 웃곤 했다. 철없을 당시에는 다자이를 동경해서 신을 믿지 않으려 한 것일지도 모른다. 성경의 내용과 교리에 대해 말하는 신부를 앞에 두고서도 아리아는 풀물이 든 손톱이나 향긋한 냄새가 나는 꽃을 생각했었다. 까막눈인 사람들과 달리 귀담아듣지 않았을 뿐, 그때까지만 해도 아리아는 그래도 신을 믿었었다. 의식이 없었던 신생아 때부터 성경과 가까웠던 삶을 살아온 탓에 그녀의 믿음은 어쩔 수 없이 존재해왔었다.

“신이 있다면, 성경에 적혔던 대로 우리 곁에 존재하신다면 제발 저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소녀의 믿음이 깨지기 시작한 것은 초경이 시작되었을 무렵이다. 초경이 시작되어 피에 젖은 흰 이불을 보았을 때, 아리아는 아주 어릴 적부터 수발을 들어주던 사용인 릴리아나의 품에 안겨 울었다. 릴리아나는 아리아보다 더 두려운 표정으로 손일 덜덜 떨면서도 아리아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얄팍한 온기에 기대어 그녀의 품에 파고들었을 때, 아리아는 릴리아나의 떨림을 이해할 수 없었다. 릴리아나는 성에 무지한 소녀를 품에 안고서 한참 토닥여주다가 이불을 빨아오겠다고 말했다. 하녀장을 불러오겠다며 소녀를 안심시킨 릴리아나는 그렇게 나가서, 정원에 있는 가장 오래되고 큰 나무에 목을 매었다. 혀를 길게 늘인 채로 죽은 릴리아나를 올려보던 아리아의 눈을 가려준 것은 그 당시 몇 달 동안 아리아와 함께 살고 있던 다자이다. 안타깝네, 그렇지? 어떠한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태연한 목소리로 말하는 다자아에 아리아는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해가 지날 때마다 꼭 하나씩 죽어갔다. 다자이의 양어머니. 다자이의 저택에서 오랜 기간 일하던 정원사. 걸음마도 떼지 못한 사촌 동생. 그들의 장례식은 열리지 않았다. 아니, 열리긴 했으나 어린 다자이와 아리아는 장례식에 참가하지 못하고 단둘이서 저택 안에 남아있어야 했다. 조용한 저택 안, 오래된 책 냄새와 먼지가 분분한 서재 안에서 다자이와 아리아는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었다. 릴리아나가 보고 싶어. 나지막이 내뱉은 말에 다자이는 눈을 깜빡였다. 손에 들고 있던 책의 표지를 덮고서 아리아를 바라보았다. 아리아, 그거 알아? 그때 다자이는 유독 즐거워 보였다. 들뜬 것 같기도 했고, 설렘이란 감정을 느끼고 있는 거 같기도 했다. 마치, 꼭…… 크리스마스 때 선물을 받아 선물을 열기 전의 아이와 같은 표정이었다. 아리아는 눈물로 잔뜩 젖은 피부를 옷소매로 벅벅 닦아내며 입을 겨우 떼어냈다. 뭘 알아? 울었던 탓에 다 뭉그러진 발음이 부끄러웠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다자이는 아리아의 발음이나 말 따위를 신경 쓰지 않았다. 대신에 소녀의 귓가에 입을 가까이한다. 릴리아나의 죽음은 너랑 내가 일조해서 만들어낸 거야. 연인에게 사랑을 속삭이듯, 잠에 들려는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듯, 아주 상냥하고 부드럽게 말을 속삭인다. 몸을 움츠리며 빠르게 다자이에게서 멀어진다. 소년의 숨결이 닿은 귀에 손을 얹고서 다자이를 바라본다.

하하하. 속았지? 이런 구절로 시작되는 소설을 며칠 전에 읽었거든. 문득 생각난 김에 말해봤어.

어릴 때의 아리아는 어색하기 짝이 없는 분위기가 꺼려져서 그렇구나, 하고 엉성하게 웃으며 수긍했었다. 여자는 그때를 후회한다. 어떻게든 캐물어서, 모든 걸 듣고 멀어져야만 했는데. 모아 쥔 손에 힘을 더 준다. 흘러내린 흰색 머리카락이 뺨을 간질인다. 차라리 다자이가 죽게 해주세요. 신이 있다면, 제발, 저를 다자이에게서……. 아리아의 간절한 기도는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자 모으고 있던 손을 아래로 툭 떨군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돈하고서 허리를 꼿꼿하게 편다. 목을 가다듬은 뒤에야 맞닿아있던 입을 떼어낸다.

“들어와.”

최대한 평온한 어투로 말을 내뱉자 정확히 오 초 정도 지난 뒤에 문이 열렸다. 릴리아나의 후임으로 들어온 아벨이 허리를 굽힌 채로 가볍게 인사한다. 아리아는 고수머리를 하나로 올려 묶은 아벨에게 시선을 둔다. 고개가 옆으로 기울어졌다. 아버지가 슬슬 출발해야 한다고 그러시니? 품에 안고 있던 드레스를 쥐었다가 놓는다.

“아뇨. 그렇지만, 조금 서둘러 준비하시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왜?”

“그게…… 다자이 오사무 님께서 직접 오셔서요. 함께 가자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자이가?”

“아뇨. 주인님께서요. 다자이 님과 주인님은 현재 응접실에 함께 계십니다.”

“알겠어. 곧 간다고 전해줘.”

“네. 아가씨. 도와드릴까요?”

“내가 할게.”

아벨은 허리를 굽히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한 뒤, 방문을 닫고 나갔다. 아리아는 그제야 숨을 내뱉어냈다. 내키지 않아 늦장을 부린다. 아주 느리게 옷을 갈아입고서 빗으로 머리를 빗어낸다. 뒷머리가 잘 보이지 않아 제대로 빗지 못했다는 핑계를 떠올리며 거울 앞에 앉아 한참을 머리만 빗어댔다. 빗을 화장대 위에 내려둔다. 아리아는 마치 죽은 사람이 제 양아버지라도 된 것처럼 파리하게 질린 낯으로 방을 나선다. 문턱 밖으로 발을 내디딘다. 그녀는 아주 느리게 걸음을 옮겼다. 계단을 내려간다. 그림이 걸려있는 복도를 지나 응접실 앞에 서서, 숨을 크게 들이쉰다. 문손잡이를 돌려 열자 화사한 빛이 아리아의 위에 내려앉는다. 안에는 양아버지와 다자이가 있다. 양아버지는 아리아를 보며 조금 놀라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온다. 다자이는 여전히 응접실 의자에 앉은 채로 소녀에서 숙녀로 변한 제 소꿉친구를 바라보며 능청스레 웃었다.

“오랜만이군. 잘 지냈나?”

아리아. 따스한 햇볕을 받은 다자이는 그를 거둬준 수양부가 죽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태연해 보였다. 아리아는 그게 한없이 두려웠다. 그 무엇보다 공포스럽게 느껴졌다. 다자이는 일어나 아리아에게로 다가간다. 그녀에게 손을 뻗으며 사람 좋은 미소를 짓는다. 아리아가 그 손을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자 그의 미소가 멋쩍음을 담아낸다. 날 잊은 건 아닐 테고. 왜 그러는 거지? 아리아는 저도 모르게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잊을 수 있을 리가. 잊고 싶어서, 어떻게든 망각하고 싶었는데도. 잊을 수 없었는데……. 왜 다자이는 언제나 모든 게 가볍고 쉬운 것처럼 말하는 걸까. 난 쟤가 어렵기 짝이 없는데. 아리아는 그려낸 듯한 미소를 입에 머금었다. 그리고 다자이의 손을 잡는다. 미적지근한 온기가 얇은 피부에 달라붙는다. 다자이의 손가락이 아리아의 손등에 내려앉는다. 피부를 쓸어내리는 그 손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아리아는 가능하다면 당장이라도 다자이의 손을 뿌리치고 밖으로 도망치고 싶었다. 다자이의 눈이 닿지 않는 어딘가로 도망가 평생을 살고 싶었다. 그러다가도 문득 떠오른 생각을 지워냈다. 다자이는 언제나 자신을 찾아내었으니까. 그 모든 가정과 생각과 바람이 쓸모없게 될 테니까. 그래서 아리아는 소망하던 모든 것을 잠시나마 망각하기로 했다. 그렇지 않으면 아리아는 일평생을 두려움에 떨어야 할 것이다. 아리아에게 있어 다자이는 그런 존재였다. 언제나, 항상,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다자이 오사무란 인간은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가. 아리아는 이따금 자신이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제 양아버지가 혼삿길을 알아보기 전부터 알고 지낸 악우를 생각해보곤 했다. 그녀가 원하든, 원치 않든 다자이는 아리아의 곁에 있던 사람이었기에 그에 대해 생각하고 문득 그를 떠올리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불쾌함을 참아내기 위해 아랫입술을 씹어댄다. 그러다가 고르지 못한 땅에 바퀴가 닿을 때마다 덜컹거리는 마차 탓에 이가 얇은 입술에 파고들었다. 아! 작게 소리를 내자 양아버지는 아리아를 보며 걱정스러운 낯으로 괜찮니? 하고 묻는다. 아리아는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자이는 그 모습을 마치 촌극처럼 바라보다가 옅게 웃으며 창문 밖으로 시선을 돌린다. 아리아는 다자이에게 닿아있던 시선을 거둬냈다. 쟤는 뭐, 어릴 때부터 저랬으니까.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아리아는 다자이란 남자에 퍽 익숙해져 있었다. 지내온 시간 때문일 수도 있고, 다자이가 유독 아리아에겐 속내를 잘 내비친 탓일지도 모른다. 달갑지 않은 사실이긴 하나, 아리아는 다자이를 타인보다는 더 잘 알고 있기에 그의 행동이나 행동의 시작점이 된 생각 정도는 쉬이 예측할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다자이는 언제나 타인과 타인의 유대감을 촌극처럼 바라보곤 했다. 관찰하는 거 같으면서도 비웃는 거 같아서 아리아는 그 모습을 볼 때면 미약한 거부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아주 어릴 적, 다자이를 피하지 않았을 무렵에는 그 모습이 퍽 어른스러워 보일 때도 있었다. 염세주의자와 같은 시선이 세상살이를 다 파악한 학자 같아서. 타인을 위하는 듯하나 타인을 파악했기에 내뱉을 수 있는 말이 꼭 조숙한 사람인 거 같아서. 이따금 아스라이 먼 곳을 바라보며 죽음을 입에 담을 때의 모습은 세상의 진리를 알아버린 연구자와 같아서……. 인정하고 싶지 않았으나, 어릴 때의 아리아는 그런 다자이를 동경했다. 어쩌면 아리아는 그녀가 가지지 못했던 모습을 탐한 걸지도 모른다. 치맛자락을 감싸 잡는다. 다자이는 그런 아리아를 곁눈질하더니 입을 벌렸다.

“왜 그러지?”

“속이, 조금 안 좋아서.”

“그래? 미스터. 잠시 쉬고 가는 건 어떨까요.”

다자이의 시선이 아리아의 양아버지에게 향한다. 그는 퍽 고민하는 낯으로 어쩌면 하나뿐인 딸을 걱정하는 듯한 표정으로 아리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자이 군의 말대로 하겠니? 아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와 이렇게 마차 안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도 힘겨운데. 다른 마을에서 얼굴을 맞대고 있어야 한다고? 그녀는 애써 웃었다. 엉성하기 짝이 없는 미소에 양아버지의 걱정이 더 깊어지는 게 눈에 띄었다. 다자이는 둘을 바라보며 실실 웃고 있었다.

“괜찮아요. 아버지. 가서 쉬면 되는걸요.”

“괜찮지 않으면 쉬어 가도 괜찮으니까 편히 말하도록 해. 내 수양부는 이미 죽은 자이고 산 자보다 중요하진 않으니 말이야.”

“그래. 다자이 군의 말이 맞단다. 그렇게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다.”

“아니에요. 아버지. 정말 괜찮아요.”

“혹여나 안 좋으면 꼭 말하도록 해라. 알겠지. 그리고 다자이 군. 마음이 복잡할 텐데 내 딸을 신경 써주어서 너무나 고맙네.”

“아닙니다. 아리아는 제 하나뿐인 소꿉친구인걸요. 소중하니까, 이 정도는 어려운 일도 아니죠. 그런 말이 있지 않나요. 소중하면 소중할수록 품에 가둬두고 매일 밤이 되면 보고, 닦아내라는…….”

“자네의 수양부가 자주 그렇게 말하곤 했지.”

“하하. 네. 맞습니다. 아무래도 거둬진 자식인지라 수양부께는 많은 것을 배웠죠.”

그려낸 듯한 미소 뒤에는 뭐가 있을까. 아니, 존재하긴 할까? 아리아는 둘이 과거의 이야기를 나누는 걸 지켜보았다. 그러다가 다소 딱딱한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다. 레이스가 피부에 닿자 조금 따가웠고, 간지럽기도 했다. 바르게 앉아야 하는데. 이렇게 앉으면 예의도 아닐뿐더러, 다자이에게 풀어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도 않은데……. 사소한 것을 따지기엔 아리아는 너무나 지쳐있었다. 피로했고, 피곤했다. 누군가 허락만 해준다면 당장 저택으로 돌아가 침실 안에 틀어박히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피곤하면 편히 쉬도록 해. 아리아.”

“다자이 군의 말대로 해도 된다. 어차피 너희는 소꿉친구니 예의를 신경 써서 차리지 않아도 괜찮으니.”

“……그러면 도착할 때까지만, 이렇게 있을게요.”

“걱정하지 마. 곧 도착할 테니까. 아리아.”

다자이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진다. 호선을 그린 눈매 사이로 갈색이 사그라든다. 반쯤 쳐진 커튼 틈새로 들어온 빛을 받을 때면 그의 눈동자는 미약하게 반짝였다. 그러다가도 곧 다자이가 고개를 살짝 돌리면 옅은 빛조차 금세 모습을 감추었다. 다자이는 아리아의 양아버지와 눈을 맞추고 대화하다가, 이따금 마부에게 말을 걸었다. 얼마나 걸릴 거 같지? 다자이의 물음에 마부는 화들짝 놀라며 다급히 대답했고, 그에게 들은 말을 꼭 아리아에게 전달했다. 우리 저택이 있는 마을의 입구라고 하니 곧 도착할 듯해. 양아버지는 아리아를 무척이나 신경 써주는 다자이에게 몇 번이나 감사를 표했다. 남자는 언제나 몸이 약한 딸을 걱정했기에 다자이의 섬세한 행동과 세심한 말이 퍽 감동적인 모양이었다. 변치 않을 우정을 본 것처럼 구는 모습에 아리아는 잠시나마 다자이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이 마치 촌극을 보고 있는 것만 같다. 실제론 걱정도 하지 않고, 큰 관심도 없는 주제에 관심에서 비롯된 걱정을 연기하는 다자이와 그걸 의심조차 하지 않고 믿는 아버지까지. 우습기 짝이 없는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아리아는 처음으로 다자이가 왜 모든 것들을 촌극처럼 바라보는지 이해해버리고 말았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가히 최악이라 칭해도 어색하지 않고 잘 어울릴 정도로 엉망이 되었다.

“괜찮아?”

“……응?”

“안색이 안 좋은데. 좋지 않으면 돌아가도 좋다네. 장례식이 끝나면 내가 네 저택으로 찾아가도 되는 일이니까.”

저택으로 찾아온 다자이를 떠올린 순간, 아리아는 고개를 힘껏 저을 수밖에 없었다. 다자이는 크게 소리 내어 웃었고, 양아버지는 그렇게 부끄럽냐며 짓궂게 물었다.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그저 피하고 싶은 것이었다. 다자이를 만나게 되는 것도, 만나게 되어 휘둘리는 것도 이젠 넌더리가 났다.

“그런 거 아니에요.”

“그래. 다자이 군이 참 인물이 좋긴 하지.”

“별말씀을요. 아리아도 무척 아름답지 않나요. 저희 마을까지 소문이 자자합니다.”

“아리아는 참 잘 자라주었지.”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다자이의 시선이 아리아에게 닿는다. 그의 망막에는 상복을 입은 아리아가 맺혀있다. 오로지, 아리아만이 맺혀있다. 참, 잘 자라주었죠. 나긋한 어투로 말한 다자이는 곧 완전히 눈을 접어 웃는다. 아, 도착했네요. 슬슬 내릴까요. 마차가 멈추고 그는 아리아의 양아버지부터 내리도록 했다. 다음으로 자신이 내리더니 에스코트하겠다는 듯 손을 내밀고서 마차의 입구 쪽에 서 있다. 아리아는 결국 미간을 찡그린다.

“뭐 해?”

“에스코트.”

“아버지나 따라가서 안내해드리던가. 난 혼자 알아서 내릴 수 있어.”

“어릴 때는 걸려서 넘어진 주제에~?”

“어릴 때 이야기는 하지 마. 난 지금 성인이야.”

“내가 설마 모를까. 네 성인식에 꽃다발과 홉킨스 부인이 들여온 향수를 보낸 게 난데.”

“그게 너였어?”

“아아. 이 얼마나 박정한 여자인가. 성년을 축하해주었는데 알아주지도 않다니.”

그는 마치 셰익스피어의 연극을 연기하는 사람처럼 극적으로 말하다가 더욱 짙은 미소를 머금었다. 계속 이러고 있으면 네 아버지가 걱정할 거야, 아리아. 좋게 가는 편이 너도, 나도 편할걸? 그편이 그림도 좋고. 잡음도 안 나올 테고. 다자이는 논리적이지 못한 것처럼 굴면서 그 누구보다 논리적으로 말하는 법을 알았다. 답지 않게 잘 만들어진 문장을 들을 때면 반박할 말조차 명확하게 떠오르지 않을 정도였다.

“사이가 돈독해 보이는 쪽이 좋잖아?”

“말만 잘하지. 넌.”

“별말씀을.”

아리아는 다지아의 손바닥에 손을 올릴 수밖에 없었다. 평균적인 체온보다 낮은 온도가 느껴졌다. 그것은 다자이가 조금 더 사람처럼 보이지 않게 도와주곤 했다. 다자이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은 아니다. 아니, 인간이 아닐지도 모르지. 저런 사람이 어떻게 인간일 수 있겠는가. 타인을 멸시하고, 멸시하는 주제에 흥미로워하고, 그 흥미가 동등한 사람이라서가 아닌 본인의 권태로움을 지워내기 위해 존재하는 유희로 인식해 생겨나는 존재가. 다자이는 사람이 아니다. 사람이라면 저럴 수 없었다. 아리아는 아랫입술을 씹어대다가 타인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닿아있다는 걸 자각한 순간 아주 자연스럽게 웃었다.

“표정 관리에 좀 익숙해진 모양이네.”

“조용히 해주지 않을래, 다자이?”

“오랜만에 만난 소꿉친구 아닌가. 쌓인 회포를 푸는 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네만.”

“우리가 그럴 사이였던가.”

“충분히 그럴만한 관계지.”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긴 해?”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 이렇게 말한 게 아닐까. 안 그래?”

다자이는 뾰로통한 표정의 아리아를 보며 낮은 목소리로 웃는다. 내 수양부의 장례식이 시작되면 신경 써주지 못할 거야. 그때부턴 네 양아버지와 함께 돌아다니도록 해. 아예 저택 안에 있어도 괜찮고. 손님방 하나 비워뒀어. 어딘지 모르겠다면 하녀장인 애니에게 물어보도록 하고. 말을 끝낸 다자이가 고개를 돌려 아리아와 눈을 맞춘다. 이해했지? 그는 자신과 동갑인 주제에 언제나 웃어른이 된 것처럼 되묻곤 했다. 그게 다자이의 버릇이라면 버릇이었다. 그게 퍽 마음에 들지 않아 아리아는 퉁명스레 대답한다. 이해했어. 내가 애도 아니고, 고작 그런 걸 이해하지 못할 리가 없잖아. 그러면 또 쉽게 수긍한다. 그러고 보니 성년이 지났었지. 세월이 참 빨라.

“그렇지 않은가?”

“애늙은이 같아.”

“본래 생각이 어린 사람들이 성숙한 사람을 볼 때면 그렇게 말하곤 하더군.”

“애늙은이.”

“마음대로 말해. 어차피 저택 안에 들어가면 넌 한마디도 못 하잖아.”

“안 하는 거야.”

“아니? 못 하는 거겠지.”

입술을 달싹이다가 윗입술로 아랫입술을 내리누른다. 손가락을 안으로 말아쥔다. 무어라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발만 앞으로 떼어내고 바닥에 내딛길 반복했다. 딱딱한 바닥에 구두 굽이 닿을 때마다 작은 소리가 났다. 아리아가 만들어낸 소리는 타인의 대화 소리에 살라 먹혀 곧 사라진다. 아리아의 시선은 아스라이 멀리 있는 사람들에게 향한다. 그들은 검은색 상복을 입고 부채로 입을 가리거나, 질 좋은 와인을 마시며 유유히 대화를 나누고 있다.

“저 와인에 쥐약을 타면, 우리 저택 안에 있는 공동묘지가 부족해지겠어.”

“뭐?”

“네가 들은 말 그대로인데. 다시 한번 말해주는 게 좋을까?”

저 와인에 쥐약을 탄다면 저 많은 사람을 다 묻을 땅이 없다는 뜻이야. 다자이는 아주 쉽게 타인의 죽음을 입에 담았다. 아리아는 평범한 윤리의식과 도덕성을 가진 인간이었기에 다자이의 말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저기 있는 사람들 싫어해? 아리아가 묻자 다자이는 눈을 동그랗게 뜬다. 만난 적도 적은 사람들인데 싫어할 이유가 있나? 그러더니 아주 능숙하게 멋들어진 미소를 입에 문다.

“싫어해야만 사람의 죽음을 망상하고 상상하고 염원하는 자격이 주어진다고 생각해?”

“보통은 그러니까.”

“너도, 나도 보통에선 거리가 먼 사람이라는 걸 언제쯤 이해할 생각인지 알려주면 좋겠는데.”

“난 평범해.”

“그렇게 믿고 싶은 건 아니고?”

“너보단 평범할걸.”

“그건 인정하도록 할게.”

다자이는 사람이 모여있는 정원의 가운데에 다다른 뒤에야 아리아의 손을 놔주었다. 그리고 가볍게 상체를 숙여 인사한다. 완벽한 예의에 대화를 나누던 사람들은 작게 감탄하며 다자이에게로 다가간다. 수양부의 죽음이 너무나 안타깝다는 둥. 이제 홀로 남았는데 어떻게 할 거냐는 둥. 그들은 걱정할 필요가 단 하나도 없는 남자를 향해 가식적인 걱정과 위로를 건네고 있다. 다자이는 나누는 대화에 따라 아주 자연스럽게 표정을 바꾸어갔다. 제 수양부는 무척이나 훌륭한 사람이셨죠. 이제 존경해야 마땅할 분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지만, 저는 그분이 저희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셨다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이렇게 걱정해주시는 여러분들 덕에 수양부도 편히 눈감으실 수 있으시겠죠. 너무나 감사할 따름입니다. 자, 눈을 감고 기도합시다. 저의 수양부를 위해……. 남들은 진실 되지 않은 눈물을 흘리며 눈을 감았다. 손을 모아 쥐고서 기도한다. 다자이는 그들을 지켜보다가 아리아를 향해 손짓한다. 저택으로 들어가. 소리 없이 입 모양으로 말한 뒤, 그들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감사합니다. 여러분. 지금 막 도착한 제 친우가 저택 안에 짐을 다 내려두고 온 뒤에나 장례식이 시작될 듯하니 편히 대화 나누며 계세요.”

아리아는 웃으며 말하는 다자이를 흘겨보다가 막 마중 나온 하녀장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오시는 길은 좀 괜찮으셨나요? 짐을 대신 들어주는 톰이 아리아에게 묻는다. 아리아는 마차 안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다가 미간을 조금 좁혔다. 길이 가팔랐던 거 같아요. 피곤하네요. 이전보다 낮은 목소리로 조곤조곤 말을 이어나가자 톰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하녀장인 애니는 어색하게 웃으며 아리아의 곁에 선다.

“도련님께서 아가씨가 오신다고 하여 프랑스에서 만든 오리털 이불과 베개를 두셨어요. 그곳에서 쉬시면 피로가 조금 풀리실 겁니다.”

“다자이가 준비한 방 말고 다른 방은 없나요?”

“혹시 오리털이 싫으실까요?”

“그냥, 다자이가 좀 불편해서요.”

“하긴. 도련님과 아가씨는 만나지 않으신지 꽤 오래되셨었죠. 어색하신 건가요?”

“어색한 걸까요.”

이런 걸 어색하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불편하다고 해야 할까. 큰 호불호 없이 무던한 삶을 살아오던 아리아에게 있어 다자이는 이레귤러와 다름없다. 그렇기에 관계를 마땅히 정의 내릴 수 없었고, 어영부영 관계를 이어오긴 했으나 그게 전부다. 두렵고 공포스럽게 느껴지는 걸 불편하다는 짤막한 단어 하나로 치부할 수 있나? 숨을 크게 들이쉰다. 푸르른 녹읍과 향긋한 꽃향기가 코점막을 긁어대며 폐부 속에 내리 떨어진다. 정원에선 다자이와 어울리는 오래된 장미 향기가 났다. 그게 한없이 불쾌해서, 덧없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아리아는 결국 고개를 살짝 아래로 떨굴 수밖에 없었다.

“나는 프라지아 향기가 더 좋아.”

“아, 정원의 꽃이 마음에 들지 않으시나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건 아니고.”

“도련님께 말씀드려두겠습니다. 아가씨. 도련님은 아가씨를 무척이나 좋아하고 계시고, 아끼시니 잘 피어난 장미일지라도 다 뽑아내고 프라지아를 심으실 거예요.”

“그게 싫은 거야.”

“부담스러우신 걸까요?”

“부담스러운 건 아니야.”

“계속 여쭙는 게 실례라는 걸 알고 있지만…… 혹시, 그러면 싫으신 걸까요?”

“애니.”

“네?”

“실례인 걸 알면 안 물어보는 게 예의 아니야?”

아리아의 말에 애니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녀는 한참 입술을 벌렸다가 닫기를 반복하더니 손가락을 꼼지락댄다. 흰 뺨을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린다. 아, 그게요. 아가씨. 혹시, 그, 불쾌하셨나요? 애니가 띄엄띄엄 말한다. 겨우 말을 끝 맺히고선 톰을 힐끗힐끗 바라본다. 톰은 애니의 시선을 완전히 피하고 있었다. 멍청한 사람들. 아리아는 그 모습을 보고 문득 그렇게 생각했고, 동시에 생각에 환멸을 느낀다. 다자이를 오랜 시간 생각해 온 탓인가. 그녀는 자신이 다자이와 조금 닮아감을 느낀다. 이는 과민한 반응이고 자신이 예민하게 군다는 걸 알고는 있지만…… 그래도, 아리아는 다자이와 아주 조금도 닮고 싶지 않았다. 그와 비슷한 생각을 품고 싶지도 않았다.

“……들어가자. 아무래도 피곤한가 봐.”

“아. 네! 아가씨. 그렇게 하도록 해요. 저택 안에 계시겠어요?”

“아니. 나갈게. 아버지와 가까운 친우셨으니 나가는 게 예의겠지.”

“네에. 그렇게 하시도록 해요. 톰. 따라와.”

애니는 아리아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상복에 불과한 드레스를 괜히 칭찬하거나, 결 좋은 백색의 머리카락이 겨울날에 내리는 눈과 같다며 칭송하기도 했다. 애니는 왜 이렇게까지 내 비위를 맞추려고 하는 걸까. 아리아는 타인에 무관심하고 호불호가 적을 뿐이지, 눈치가 없는 인간은 못됐다. 눈치가 없었으면 그녀가 사교계에서 멀쩡히 모습을 비추기는 힘들었을 터다. 높은 직위의 가문에 입양된 입양아기에 아리아는 좋든 싫든 눈치가 늘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아리아는 오늘따라 애니가 유독 제 비위를 맞추려 들고 눈치를 살핀다는 사실을 쉬이 알 수 있었다. 물어보는 게 나을까. 아니면, 기우라고 생각하고 넘기는 게 나을까. 어떻게 하면 좋을까. 손톱 옆에 얇은 살을 검지 손톱으로 갉작인다. 아리아의 생각은 그녀를 위해 준비된 방에 다다른 순간까지도 이어졌다. 톰은 아리아가 챙겨온 몇 안 되는 짐이 담긴 가방을 바닥에 내려두었고, 애니는 몇 번이나 고개를 숙이고 방 밖으로 나섰다. 채비가 끝나시면 정원으로 오세요, 아가씨. 말을 남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다자이가 그런 건가.”

아리아는 애니와 톰이 다 나간 뒤에야 아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한참 닫힌 문을 바라보고 있다가 뒤를 돈다. 화장대로 걸어가 조금 헝클어진 머리카락이나 흐트러진 옷을 단정히 정돈한다. 거울 앞에 앉아 한참 머리카락을 매만지던 아리아는 얕은 한숨을 내뱉고선 방을 나선다. 복도는 조용했다. 이따금 밖에서 연주자들이 연주하는 장송곡의 음만 들려올 뿐이었다. 수양부라고 정이 든 건지. 아니면 보이는 것에 신경 쓴 건지. 다자이의 수양부는 그의 삶이 떠오를 정도로 퍽 화려한 장례식을 맞이하고 있다. 고작 장례식 하나에 저렇게 연주자들을 몇 명이나 부르는 건 다자이밖에 없겠지. 아리아의 기억 속에서 언제나 부드럽고 화사했던 정원의 꽃들은 전부 오래된 장미로 뒤바뀌어 있었다. 정말 수양부에게 정이라도 붙인 건가? 쟤가? 그 다자이가? 아리아는 정원이 아닌 저택 내 사람들이 사용하는 방으로 걸어간다. 이따금 마주치는 하녀나 집사들이 아리아를 보고 허리를 굽히며 인사한다. 처음으로 다자이와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낸 소꿉친구란 점에서 깊은 감사를 느낀다.

다자이의 수양부가 주로 시간을 보내던 방은 이 층 중앙에 있다. 그는 화려한 것을 좋아하고 과시하는 것에 즐거움을 느끼던 사람이었다. 방문에 황금으로 조각된 천사상을 붙여둘 정도면 말 다 했지. 아리아는 화려한 걸 좋아하는 거에 비해서 그리 좋지 않던 미적 감각을 떠올리며 혀를 찼다. 바닥에 깔린 두툼한 카펫을 밟아가며 수양부의 방 앞에 선다. 생전 그가 지냈을 방문에는 접근을 금한다는 안내문이 붙어있다. 옆에는 경관 두 명이 모여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아리아는 그들을 바라보며 입을 떼어낸다.

“실례합니다.”

예법 선생에게 배운 것처럼 아주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미소를 입에 머금는다. 경관들은 아리아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본 뒤에야 입을 떼어냈다.

“네. 아가씨. 길이라도 잃으셨나요?”

저들은 하인들에게도 저리 정중하게 말했을까? 아마도 아니겠지. 고급스러운 원단으로 만들어진 드레스와 귀티 나는 외모를 보고서 저들보다 높은 직위의 여성임을 알고 정중하게 말한 게 분명했다. 아리아는 검지로 방을 가리키며 묻는다.

“왜 들어갈 수 없나요?”

“아. 그게…….”

“아가씨. 혹시 이 집의 도련님과 어떤 사이신가요?”

“소꿉친구입니다.”

“그러면 말해도 되지 않나?”

“그래도.”

“말해주셔도 괜찮아요. 다자이에겐 이미 허락을 받고 왔습니다. 제가 알고 싶다고 몇 번이나 물었거든요. 그분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너무 슬퍼서…… 어떻게 돌아가신 건지 알고 그분을 위해 기도하고 싶어서…….”

마음에도 없는 말을 내뱉는 건 무척이나 쉬웠다. 아리아는 그의 죽음이 안타깝다고 생각하긴 하지만, 그리 슬프지는 않았다. 그의 죽음을 알려고 하는 것은 다른 이유에서 비롯되었다. 그녀는 제 속내를 감추기 위해 나오지도 않는 눈물을 닦아내는 척 손수건을 꺼내 눈가를 톡톡 두드린다. 경관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고 안타깝다는 듯 신음한다. 그러더니 곧 아리아에게로 다가간다.

“놀리지는 마시고요.”

“네에.”

“석고상에 깔려 죽었답니다.”

“……네?”

“그게, 저희도 믿기지 않아서 며칠째 조사 중이긴 합니다. 여기 입구에 있는 사자 석고 조각상에 머리가 깔려 죽었어요. 그분. 저택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다 알리바이가 있어서 타살이라고 규정하기도 애매하고. 그렇다고 자살은 아닐 테고.”

곤란하단 말이죠, 저희도. 목덜미를 쓸어내리는 경관을 보며 아리아는 마른침을 삼켰다. 티를 내지 않기 위해 규칙적으로 호흡하며 가볍게 고개를 숙인다. 감사합니다. 많은 도움이 되었어요. 그리고 그녀는 이곳이 마치 역병의 시작점이라도 되는 것처럼 다급하게 걸음을 옮긴다. 다자이다. 이건, 분명 다자이가 벌인 짓이다. 아리아는 흐르는 식은땀을 손등으로 연신 닦아내었다. 다자이는 알리바이가 확실하고, 저 방 안에는 증거 하나 남아있지 않겠지만…… 애초에 남아있더라도 다자이라면 납득시킬 만한 이유를 준비해뒀을 게 분명했으나. 아리아는 그의 수양부를 죽인 범인이 다자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다자이는 언제나 그랬으니까. 릴리아나가 죽었을 때도. 키우려고 데려온 강아지인 맥스가 죽었을 때도. 정원사인 폴이 죽었을 때도……. 그는 불운하게 가까운 사람을 잃은 불쌍한 아이가 되었으니까. 아리아는 두려웠다. 내가 죽였어, 하고 말해두고서 농담이라고 실실 웃던 작은 소년은 언제나 어떻게든 제 곁에 남아 소중했던 것들을 다 사라지고, 잃게 만들어서 이젠 소중한 걸 어떻게 만들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게 만들어버렸다. 그렇기에 아리아는 다자이가 너무나 두려웠다. 저택의 입구에 서서 숨을 뱉어낸다. 땀으로 인해 피부에 엉겨 붙은 머리카락을 떼어내고서 정원으로 나간다.

잘 관리된 잔디를 밟아가며 사람들 사이에 섞인다. 그들은 이 마을에서 오랫동안 신부로 지낸 남자의 기도문을 경청하고 있다. 다자이는 가장 앞에서 지독하게 권태로운 표정으로 말없이 서 있었다. 아리아는 그들을 지켜보았다. 신부의 기도문이 끝나갈 때쯤 다자이는 신부의 옆에 선다. 시체는 이미 관 안에 넣어두었습니다. 마지막 인사라도 하게 해드리고 싶은데, 레이디들에게 보여드리기엔 모습이 보기 좋지 않아서요. 어눌한 곳 하나 없는 발음. 나긋한 어투. 낮은 목소리. 다자이는 따로 빼두었던 싱그러운 백합을 들고서 사람들 앞으로 다가간다.

“대신이라고 하는 것도 웃기지만, 관 위에 백합을 놓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렇게 상태가 좋지 않으신가요?”

“네. 제가 봐도 조금 힘이 들더군요. 저와 같은 기분을 느끼신다고 생각하면 수양부를 뵐 면목이 없습니다. 그러니 관 위에 백합을 놓아주시는 거로 그분의 평온을 기도해주세요.”

사용인은 다자이의 말을 기다렸다는 듯 품에 백합을 한 아름 안고 정원으로 나왔다. 아리아는 애니가 건넨 백합을 손에 들고서 차례를 기다렸다. 관 위에 백합이 켜켜이 쌓여갔다. 아리아는 관 위에 쌓인 백합의 수를 가늠해보다가 들고 있던 백합을 안으로 던져 넣었다. 그리고 다자이를 보며 가볍게 묵례한다. 지적할 곳 없는 예법에 만족한 건지. 아니면 단순히 기분이 들떴던 건지. 다자이는 여전히 웃는 낯으로 따라서 묵례한다. 내 수양부의 죽음을 슬퍼해 준 당신에게 신의 가호가 있기를. 타인에겐 건네지 않았던 말을 입에 담는다. 아리아는 웃지도, 미간을 찡그리지도 못한 채로 등을 돌렸다. 줄을 서 있는 영애들은 아리아에게 부럽다며 연신 말을 걸어댔다. 그녀는 부인하면서도 속으로는 그 영애들을 비웃었다. 당신들이 내 입장이 되었을 때, 미치지 않을 수나 있을까. 아리아는 양아버지의 옆에 선다.

“안에 들어가도 괜찮단다.”

“아니에요. 아버지와 가까우셨던 분이시니 관을 닫는 것까지 보고 들어가고 싶어요.”

“오, 아리아.”

아버지는 속 깊은 딸의 말에 감동이라도 한 듯 기뻐했다. 그러면서도 힘이 들면 무리하지 말고 꼭 안으로 들어가 쉬라는 말도 잊지 않고 덧붙였다. 아리아는 별다른 말 없이 그의 곁에서 웃을 뿐이었다. 착각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실수이자 자유였고, 아리아가 그걸 교정시켜 줄 의무는 없다. 다자이는 관의 뚜껑을 살짝 연다. 언뜻 보이는 관 속은 빛나는 황금이 있었고, 그 모든 것들을 중국에서 난 실크가 뒤덮고 있다. 그는 그것에 대고 무어라 속삭인다. 그리고 실크 위에 입을 가볍게 맞춘다. 다자이는 어디에 입을 맞춘 걸까. 이마? 콧잔등? 입술? 아니면 그의 둥근 머리를 쓰다듬었을 손? 애초에 관 속에 수양부의 시체가 있기나 할까? 아리아는 경관에게 들었던 말을 곱씹고 또 곱씹는다. 사자 석고상에 머리가 깔려 죽었다는 말을 곱씹을 때면 아리아는 어쩔 수 없이 다자이를 떠올렸다. 다자이가 그 무거운 석고상을 들 수 있을까? 아무리 성인 남자의 힘이라 한들 한계가 있는 법이다. 그것도 힘을 쓰는 일을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도련님이 석고상을 들어 올려 침실까지 옮기는 건, 상상하기 힘들었다.

“아버지.”

양아버지는 그녀에게 시선을 둔다. 그의 두 눈동자에는 의문이 맺혀있다. 남자는 고개를 옆으로 기울인다. 느리게 멀어지는 입술 틈새로 말이 새어나온다.
“왜 그러니, 아리아?”

“아버지는 석고상을 옮겨본 적이 있으신가요?”

“그런 건 정원사나 잡일을 하는 하인에게 시키면 되지 않니? 내가 그런 걸 할 필요는 없지. 갑자기 왜 그런 게 궁금해진 거니?”

“그냥요. 다자이네 수양부는 석고상을 모으시는 게 취미셨잖아요. 그래서 궁금해졌어요.”

“이 아비는 석고상은 들지 못해도 넌 안아줄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말거라. 네가 아프면 내가 품에 안아 들고 의원에게 찾아갈 테니.”

“기뻐요. 아버지.”

보통은 저런 반응이겠지. 직접 옮길 이유를 느끼지 못하고, 그런 건 하인에게 시키면 된다고 말하고…… 그런데 다자이가, 그 다자이가 증거가 될만한 일을 타인에게 시켰을까? 아리아의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다자이는 수양부와 마지막 인사를 끝 맺히고 관의 뚜껑을 다시 닫았다. 그러면 사용인들은 관을 공동묘지에 묻기 위해 시체와 사치품이 든 관을 들어 올렸다. 사람들이 흩어진다. 다자이에게 가식적인 위로를 남기고 집으로 돌아갈 채비를 한다. 다자이는 능숙하게 그들을 배웅하고서 아리아와 아리아의 양아버지에게로 다가온다.

“많이 기다리셨습니다.”

“아닐세. 내 친우도 자네의 모습을 보고 안심했을 거야. 무척이나 능숙하더군.”

“모두 수양부의 덕분이죠. 배운 것도 없는 제가 이렇게 성장할 수 있게 도와주신 분이시니까요.”

“도움이 필요한가?”

“그러면 며칠만 제 저택에 남아 도와주실 수 있으실까요. 이리 갑작스럽게 떠나실 거라고 생각하지 못한 터라 준비해 둔 게 아무것도 없어서요.”

“당연히 해줄 수 있지. 아리아. 너는 어떻게 할 거니?”

양아버지와 다자이의 시선이 아리아에게 닿는다. 그녀는 입술을 달싹였다. 이 저택에 며칠은 더 묵어야 한다고? 아리아는 그것을 원치 않았다. 당장이라도 마차에 몸을 실어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만약에 며칠 뒤, 양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신다면? 그러면 그녀에겐 무엇 하나 남지 않게 되었다. 얇은 목을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린다. 아리아? 다자이가 그녀를 부른다. 그리고 아주 상냥하게 말한다.

“너무 힘들면 돌아가도 괜찮아. 너는 어릴 적부터 유약했으니, 저택으로 돌아가 쉬는 것도 좋겠지.”

“……아니야.”

“음? 괜찮겠어?”

“괜찮아. 여기서 쉬면 되니까.”

다자이는 사람 좋게 웃으며 아리아에게 다가간다. 그리곤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는다. 내 오랜 친우가 있어 주니 마음이 든든하군. 무척이나 기뻐, 아리아. 네가 여기 남아주겠다고 말한 덕에 수고로울 일을 덜었어. 아리아는 다자이가 말하는 수고로울 일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아리아는 의문을 혀 위에 올리지 않았다. 어떨 때는 침묵이 가장 좋은 수단이 된다는 걸 그녀는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양아버지는 걱정스러운 듯했지만, 친우를 위하는 듯한 딸의 모습에 기뻐했다. 저녁은 괜찮은 와인을 마시는 것도 좋겠다는 말에 다자이는 고개를 끄덕인다. 이탈리아에서 좋은 와인을 들여왔는데 그걸 마셔도 괜찮겠군요. 둘은 대화를 나누며 저택을 향해 걸어간다. 아리아는 그 뒤를 따라 걸었다. 동등한 위치임에도 굳이 뒤를 고집했다.

“아리아~.”

저택의 입구에 멈춰 선 다자이가 등을 돌려 여자를 바라본다. 아리아는 조금 놀라 몸을 움츠린 채로 대답한다. ……왜. 그러면 다자이는 낮게 소리 내어 웃는다. 왜 그렇게 겁먹은 거야? 그냥 어떤 와인을 좋아하는지 물어보려는 거뿐이야. 겁먹지 않아도 돼. 내가, 너한테 뭘 할 리가 없잖아. 우린 친구인걸. 친구라는 단어가 이리도 불편하게 느껴질 줄이야. 입술을 겨우 떼어낸다. 난 와인을 즐기는 편은 아니야, 다자이. 의아함에 이유를 묻는 양아버지에 그녀는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다자이가 와인에 쥐약을 타서, 이 저택의 공동묘지에 묻힐까 봐요. 쟤가 이따금 관의 뚜껑을 열고 실크로 뒤덮인 제 시체에 입을 맞출까 봐, 그게 너무 싫고 두려워서요. 그래서 와인을 마시지 않는 거예요. 죽기 싫어서요. 죽고 싶지 않아서요. 죽더라도 쟤 곁에서 눈을 감고 싶지 않아서요. 떠오르는 생각은 쓸데없이 많았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입에 담을 수 있는 말은 하나도 없었기에 입을 꾹 닫았다.

 

다자이의 저택은 고요하다. 수많은 사용인이 있는 것 같지도 않고, 오로지 아리아만이 남아있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침대 안에서 상체만 일으킨 채로 창문 밖에 시선을 둔다. 붉은 장미가 만개한 정원은 화려한 듯했지만, 고요하다. 지저귀는 새가 허공을 날고 있다. 석고로 만들어진 천사 분수대에선 물이 뿜어져 나오고 있다. 유지하는데 얼마나 들까? 아리아는 문득 의문을 품다가 곧 지워냈다. 어차피 내 저택도 아니고, 내 돈도 아니니까. 이불을 걷어낸다. 피부에 달라붙어 있던 온기가 서서히 옅어진다. 아리아는 선반에 올려진 작은 종을 유심히 바라본다. 만약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종을 울려주세요, 아가씨. 유난히 저자세로 나오던 애니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종에 손을 뻗는다. 가볍게 종을 흔들자 청아한 소리가 방에 울려 퍼졌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

“아가씨, 애니입니다. 들어가도 괜찮을까요.”

“들어와.”

아리아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문이 열린다. 애니는 미처 사라지지 않은 잠의 수마를 잊게 해줄 차가 담긴 주전자와 그것을 담아낼 찻잔이 올려진 트레이를 끌며 안으로 들어온다. 간밤에 편히 주무셨나요, 아가씨? 애니의 물음에 아리아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침대 옆에 있는 작은 탁자와 함께 갖춰진 의자에 앉는다. 애니는 아주 자연스럽게 찻잔과 찻주전자를 탁자 위에 올려두었다.

“아버지는?”

“다자이 도련님과 함께 사냥을 나가신다고 하시더군요. 아침은 두 분이 잡아 온 토끼로 스튜를 끓일 예정입니다.”

“……사냥?”

“네. 사냥이요.”

“아버지랑 다자이랑 둘이서 간 거야?”

“아. 톰이 따라 나갔습니다. 두 분께 남기실 말씀이라도 있으셨나요?”

“아니. 그런 거면 됐어.”

“……도련님께서 아가씨가 환경이 바뀌시면 좀 예민해지신다고 하셔서요. 오늘 차는 캐모마일로 준비했습니다.”

애니의 말대로 내가 조금 예민하게 구는 걸까. 찻잔에 따라진 갈색의 액체. 그 속에 담긴 자신의 모습을 본다. 눈을 느리게 감았다가 뜬다. 찻잔의 손잡이를 쥐고서 찻물을 한 모금 머금는다. 너무 식지도, 뜨겁지도 않은 액체를 식도 뒤로 넘긴다. 부드러운 맛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던 몸이 유연해진다.

“필요하신 게 있으시다면 편히 말씀해주세요.”

“아버지는 언제쯤 돌아오셔?”

“아마 곧 돌아오실 듯해요. 해가 뜨기 전에 나가셨거든요.”

“다자이가 사냥을 자주 즐겼던가?”

“주인님께서 도련님과 사냥하는 걸 좋아하셨었어요. 자연스럽게 습관처럼 굳어지신 것 같습니다.”

“그래, 그렇구나.”

찻잔을 내려둔다. 의자 등받이에 몸을 완전히 기대고서 얕은 숨을 내뱉는다. 꽤 오랜 시간 잤는데도 피곤해. 투정처럼 내뱉은 말에 애니가 작게 웃는다. 아가씨께선 어릴 적부터 저택에 오신 다음 날 아침마다 꼭 그렇게 말씀하셨었죠. 환경이 바뀌는 걸 그리 좋아하시지 않으셨으니까요. 애니의 말에 아리아는 자연스럽게 릴리아나를 떠올렸다. 언제나 자신을 세심하게 살펴주었던 그녀가 지금도 곁에 있었더라면 뭐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예민한 성정이나. 쓸데없이 생각을 이어 나가는 안 좋은 버릇이 조금이나마 나아졌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한숨을 내뱉을 때면 애니는 차와 함께 곁들일 다과를 아리아의 앞에 놓아주었다.

“피곤할 때는 단 것이 좋다고 하더라고요.”

“고마워, 애니.”

“도련님께 말해드리면 좋아하실 거예요.”

“다자이한테?”

“도련님께서 아가씨께 마들렌을 내어두라고 명하셨었습니다.”

“……안 먹을래.”

“혹시 다투기라도 하셨나요?”

“그런 건 아니야.”

다자이가 준비해준 다과라고 하니 입맛이 뚝 떨어졌다. 떨떠름한 표정으로 다과가 담긴 그릇을 탁자 구석진 곳까지 밀어둔다. 안 먹고 싶어서 그래. 다투지 않았어. 덧붙여 말하자 애니는 순순히 수긍한다. 저것도 다자이가 명한 걸까. 아니면 애니의 판단인 걸까. 뭐가 됐든, 아리아는 지금의 상황이 달갑지 않았다. 그녀는 앉아있던 의자에서 일어선다. 옷장을 열고 입을 옷을 꺼낸다. 애니는 능숙하게 탁자 위의 물건을 정리하고 아리아에게 걸어온다.

“착의를 도와드릴게요.”

“응, 잘 부탁해.”

입고 있던 잠옷을 벗고 챙겨온 드레스를 입는다. 애니는 끈을 묶어주거나 등 뒤의 단추를 끼워주었다. 화장대에 앉았을 때는 머리를 세심하게 빗겨주며 말을 걸어온다. 못 본 새에 머릿결이 더 좋아지신 거 같아요, 아가씨.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며 아리아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구나. 성의가 없다고 느껴질 수도 있는 대답에도 애니는 불쾌함을 보이지 않았다. 아리아는 애니에게서 시선을 거둬낸다. 대신에 들어오는 햇볕을 받을 때면 미약하게 반짝이는 하늘색의 눈동자에 시선을 두었다. 아리아는 치장이 다 끝난 뒤에도 한참을 화장대 앞에 앉아있었다. 애니는 재촉하지 않고 참을성 있게 그녀의 뒤에서 대기했다. 아리아가 화장대에서 일어난 것은 밖이 소란스러울 무렵이었다.

“도련님과 아가씨의 아버님께서 돌아오신 모양입니다.”

“슬슬 나가는 게 좋겠지?”

“네. 애피타이저를 드시며 대화를 나누고 있으시면 좋을 거 같아요.”

아리아가 의자에서 일어서자 애니는 그녀의 뒤에 따라붙었다. 애피타이저는 뭐야? 아리아의 물음에 애니는 당황한 기색 하나 없이 무던한 투로 대답한다. 좋은 새우가 들어와서 새우 샐러드와 브리오슈 빵이에요. 수프는 버섯 수프인데. 만약 버섯을 못 드시면 편히 말해주세요. 주방장에게 말해두겠습니다. 아리아는 그녀의 안내를 받으며 일 층에 있는 방으로 향한다. 모든 길이 익숙했고 동시에 낯설었다. 저택에 있던 코끼리 상아나 값이 비싼 석고 조각상은 죽은 남자의 영향으로 다 치워둔 모양이었다. 드문드문 걸려있는 그림과 바닥에 깔린 붉은 카펫만이 단조로운 저택을 그나마 보기 좋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문 열까요, 아가씨?”

“잠시만.”

“혹시 어디 안 좋으세요?”

“아니. 잠깐이면 돼. 애니.”

숨을 크게 들이쉬고 뱉어낸다. 금으로 세공된 장식물이 다닥다닥 붙은 문을 한참 바라보다가 말한다. 문 열어줄래, 애니? 그러면 애니는 너무 느리지 않은 속도로 다가와 문을 연다. 화사한 빛이 아리아의 발등에 내려앉는다. 샹들리에에 달린 크리스털이 빛을 받을 때마다 반짝인다. 아리아는 아래에 두었던 시선을 서서히 위로 올렸다. 양아버지와 다자이가 마주 앉아 즐겁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사냥하던 복장 그대로 온 것인지 흰 천에는 드문드문 흙이 묻어있다.

“아, 왔니. 아리아?”

“네. 아버지. 사냥은 즐거우셨어요?”

“다자이 군의 사격 실력이 상당히 좋더구나. 토끼나 사슴을 꽤 많이 잡았어.”
 “그렇게 극찬해주실 실력까진 못 됩니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셰퍼드가 조금 사납더군.”

“하하. 수양부께 제안 드려 만들어낸 사나운 품종입니다. 사냥할 때 쓸모가 있을 거 같아서요.”

“위험하지 않나?”

“교육해 두어서 명령 없이는 사람을 공격하진 않습니다.”

아리아는 양아버지의 옆에 앉았다. 그녀가 자리에 앉자 내어진 애피타이저는 흠잡을 곳 없이 깔끔하다. 포크로 샐러드를 조금씩 집어 입에 넣는다. 다자이는 아리아가 먹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포크를 손에 쥐었다. 오늘 잡은 토끼는 살이 꽤 올라 맛이 좋겠더군요. 그러면 양아버지는 호탕하게 웃으며 긍정한다. 저녁 만찬을 그거로 해도 좋을 거 같았는데. 아쉽군. 아리아는 이따금 웃을 뿐, 큰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그릇이 포크의 끝자락에 긁히지 않게 신경 쓰며 먹기 좋은 크기로 잘린 채소를 뒤적인다.

“입에 안 맞아?”

느리게 움직이던 손이 멈췄다. 아리아는 고개를 들어 다자이를 바라본다. 다자이는 턱을 괸 채로 아리아를 직시하고 있다. 안 먹고 있길래. 걱정돼서. 우리 주방장은 솜씨가 꽤 좋은 편이라 음식 맛은 나쁘지 않을 텐데……. 손가락이 식탁을 두드린다. 다자이의 미소가 더욱 짙어진다. 아리아는 입술을 씹으며 아침이라 그래, 하고 당장 떠오른 그럴싸한 변명을 말한다. 양아버지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인다.

“생각해보면 넌 아침에 식사를 잘 하지 않는 편이었지.”

“네. 조금 더부룩해서요.”

“아쉽네. 널 위해서 잡은 토끼였는데.”

“나를 위해서라고?”

“응. 막 사냥해서 온 토끼를 사용한 요리는 맛이 꽤 괜찮거든. 우리 마을은 토지가 꽤 비옥해서 살이 잘 오르기도 했고.”

속이 울렁거렸다. 투명한 유리잔에 따라져 있는 깨끗한 물을 조금씩 마시고 준비되어 있던 냅킨으로 입가를 닦아낸다. 양아버지는 굳이 무리해서 먹지 않아도 괜찮다고 연신 말해댔다. 아리아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입맛을 돋울 정도로 좋은 냄새가 나는 음식이 순서대로 나왔다. 그녀는 딱 한 입 정도 맛만 보고 손에 들고 있는 스푼이나 포크를 테이블 위에 내려두길 반복했다. 다자이는 이따금 웃는 낯으로 못 본 사이에 많이 못 먹게 되었다고 말했고, 그 말에 아리아는 치맛자락을 억세게 쥐었다. 대화는 주로 다자이와 아리아의 양부가 이어갔다. 다자이는 아리아 또한 대화에 강제적으로 끼워 넣고 싶은 건지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그녀에게 말을 걸었지만, 대답해주지 않은 탓에 흐지부지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토끼 스튜입니다. 함께 나온 곁들일 빵을 찍어 드세요.”

앞에 놓인 그릇 안에는 넓은 초원을 뛰어다녔을 토끼의 살점이 담겨있다. 아리아는 본래 약육강식이 당연하다 여기며 인간이 살아가는 것에 자연이나 동물의 희생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 토끼를 죽인 게 다자이라고 생각하니. 언젠가 스튜 안에 담길 존재가 내가 될 것만 같아서……. 속이 좋지 않았다. 입술을 손으로 가린다. 거울을 보지 않았음에도 지금 제 낯빛이 좋지 않을 거라는 걸 쉬이 예상할 수 있었다. 아리아의 고개가 아래로 내려간다. 긴 백색의 머리카락이 뺨을 간질인다. 다자이는 그 모습을 보고 낮게 신음한다.

“아리아가 몸이 좋지 않은 모양이네요. 제가 방까지 데려다주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다자이 군이 함께 해주면 걱정할 게 없구나. 너무 좋지 않으면 꼭 말하거라. 아리아.”

알겠니? 양아버지는 어떠한 고민도 없이 아리아를 다자이에게 맡겼다. 아리아는 다자이가 겉보기엔 믿음직한 친구라는 걸 알면서도, 그의 선택이 원망스럽기 짝이 없었다. 양아버지를 향해 가볍게 인사하고 다자이와 함께 방을 나선다. 사용인들은 어디로 가버린 건지 보이지도 않았다. 다자이는 아리아의 옆에 나란히 서서 느리게 걸음을 옮기고 있다. 저거 기억해? 네가 여기서 잠시 머물렀을 때 그렸던 그림이잖아. 하하. 그때 가만히 앉은 채로 있는 게 고역이라고 울음을 터트렸었지. 다자이는 아무렇지 않게 과거를 입에 담는다. 아리아는 서서히 느리게 걷다가 곧 멈춰선다.

“몸이 그리 좋지 않은 거면 의원이라도 불러줄까?”

“다자이.”

“응. 아리아.”

“여기에 있어 달라고 말한 이유가 뭐야?”

다자이는 눈을 감았다가 뜬다. 그의 밤색 눈동자가 사라졌다가 모습을 드러낸다. 아리아는 다자이 눈동자 속에 자신의 모습이 맺힐 때면 이상하게도 피식자가 된 듯한 기분이 들곤 했다. 시선을 피한다. 그러자 다자이는 아리아에게로 한 걸음씩 다가간다. 참, 이상하지. 그는 마치 시를 읊듯이 느리게 운을 뗀다. 그러더니 아리아의 뺨을 감싸 쥐고서 입이라도 맞출 것처럼 얼굴을 가까이한다. 나는 자네에게 잘해준 기억밖에 없는데. 다자이의 눈동자가 뱀의 것처럼 번들거린다. 아리아는 그의 말을 완곡하게 부정할 수 없었다. 실제로 다자이는 그를 거둬주고 키워주며 물심양면으로 지원해 준 수양부보다도 아리아를 아꼈다. 이따금 두 집안 사이에서 결혼 이야기가 오고 갔을 정도였다.

“그런데 왜 넌 날 이렇게 무서워할까.”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옆으로 기울인다. 아리아는 저도 모르게 입고 있는 드레스의 천을 매만진다. 모조리 헤집어지는 것만 같았다. 입고 있는 옷이 바닥에 떨어지고, 살가죽이 벗겨져 근육과 살 그리고 뼈가 어떻게 생겼는지 파악당하는 기분이었다. 불쾌했다. 불쾌했기에 두려웠다. 두렵기에 울고 싶었다. 손이 잘게 떨린다. 아리아는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기억을 끄집어낼 수밖에 없었다.
“야.”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눈을 질끈 감는다. 다자이는 왜? 하고 대답한다.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일평생 묻어두고 살고 싶었다. 깊이 묻어둔 기억을 떠올리고자 할 때면 자연스럽게 릴리아나의 죽음이 따라붙었다. 흔들리는 얇은 나뭇가지. 그것들을 지탱하는 단단한 가지. 아래로 툭툭 떨어지는 마른 나뭇잎. 늘어진 흰 다리와 불어오는 바람에 흩날리는 얇은 천.

“릴리아나는 너가 죽였잖아.”

그래놓고, 너도 그 나무에 목을 매려고…… 했잖아. 목이 멨다. 가라앉았지만 잘게 떨리는 목소리가 아리아의 감정을 알려주는 듯했다. 눈을 겨우 뜬다. 다자이의 시선은 여전히 아리아에게 닿아있다. 그는 웃는 낯으로 입술을 벌렸다가 닫는다. 쓸데없이 뜸 들이는 모양새에 아리아의 미간이 좁아진다. 네가 죽였으면서. 어릴 때, 그렇게 말했으면서. 증거는 없었지만, 심증은 있었다. 다자이와 릴리아나는 그때 아리아보다 더 오랜 시간을 보냈었으니까. 이따금 다자이가 귓가에 작은 목소리로 말을 속삭일 때면 릴리아나의 표정이 변했다. 환하게 웃거나,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인상을 쓰거나, 낯빛이 파리하게 질렸었다. 아리아의 기억 속 릴리아나는 날이 갈수록 야위어갔고 다자이를 자주 이야기했었다. 그녀는 죽기 전까지 그랬다.

“난 널 잘 알고 있는 릴리아나에게 많은 걸 물어보았을 뿐이야.”

“어째서?”

“너랑 잘 지내고 싶으니까?”

릴리아나의 죽음은 나도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어. 참 안 된 일이지. 다자이는 아주 자연스럽게 아리아를 에스코트했다. 손을 잡고 앞장서 걷는다. 그녀는 남자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경관에게 들은 말이 충격적인 것도 이해해. 그리고, 환경이 바뀌기도 했잖아? 네가 지내던 마을과 이곳은 사뭇 분위기가 다르니 적응하기 힘들 수도 있겠군. 그리 좋은 이유로 이곳에 온 것도 아니니까 릴리아나의 죽음을 다시 떠올리게 된 걸지도 몰라. 다자이의 발은 아리아가 지낼 방 앞에서 멈췄다. 아리아는 다자이를 올려본다. 그는 유순하게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네가 좀 예민한 거 아닐까? 널 배려하지 못한 내 잘못도 있지만 말이야.”

“좀, 놔.”

“알겠어. 말을 이어서 하자면 내가 정말 릴리아나를 죽였다면 네 아버지가 나와 널 단둘이 둘 리가 없잖아. 아리아.”

다자이의 손은 쉽게 떨어져 나갔다. 피부에 붙어있는 미지근한 온기가 공기와 뒤섞여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 내가 네 양아버지께 이곳에 남아달라고 부탁한 건, 단순히 도움이 필요해서야. 그는 식은땀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정돈해주며 자신이 마치 아리아의 유모라도 된 것처럼 다정하게 속삭인다.

“단순하게 생각해주길 바라. 난 네게는 악의가 없어.”

“……믿어도 돼?”

“신에게 맹세하지.”

심장이 있는 왼 가슴에 손을 얹고서 진중히 말하더니 히죽 웃는다. 안으로 들어가서 쉬어. 방해하지 않을 테니까. 친히 문까지 열어주는 모습에 아리아는 몇 번이나 다자이를 돌아보았다. 그는 아무런 위해도 가하지 않을 거라는 듯이 무해하게 웃으며 뒷짐을 지고 있다. 잠시 고민하다가 다자이와 눈을 맞춘다. 고마워. 그러자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방에서 멀어진다. 아리아는 다자이가 보이지 않을 때쯤에야 방문을 닫았다. 촘촘하게 짜인 정적이 내려앉은 방. 아리아는 바닥에 깔린 융단을 밟아가며 중앙에 있는 소파에 앉았다. 다자이의 말 따라 너무 예민한 걸까. 신경을 너무 쓴 탓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관자놀이를 엄지로 꾹꾹 눌러가며 발을 편히 아래로 뻗는다. 그녀는 크게 난 창밖을 바라본다. 평화롭기 짝이 없는 정원이 망막에 맺혔다. 정원사는 땀을 뻘뻘 흘려가며 싱그럽게 피어난 장미를 넝쿨째 뽑아내고 있다. ……어쩌면 다자이의 말대로 내가 예민하게 구는 게 아닐까. 아리아의 기억 속 다자이는 힘든 삶을 살아와 타인에게 공감하는 게 어려웠다. 다자이가 말했던 게 아니라, 다자이를 거둔 수양부가 그를 소개할 때 그리 말했었다. 그러니, 네가 조금 이해해주고 돌봐주면 좋겠다고. 그렇게 말하던 남자를 떠올리면 입이 썼다. 발을 가지런히 모아 앉는다.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가볍게 농담한 걸지도 모르지. 애초에 아버지가 위험할 거 같으면 그렇게 쉬이 보내주실 분도 아니고. 다자이의 말대로 정말, 내가 예민한 거라면? 퍼석하게 마른 입술을 혀로 훑는다. 무릎에 얼굴을 파묻는다. 실크로 만들어진 레이스가 피부를 간질인다. 정말 예민해서 실수를 저질렀다면 어떻게 해야 하지. 다자이는 수양부를 잃은 사람이다. 내심 정이 많이 든 것처럼 보였는데. 힘들 애를 내가 의심해선.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시선을 위에 둔다. 사과하는 게 좋지 않을까. 사과하고, 조금 예민하게 굴었다는 걸 인정하고……. 아리아의 시선이 문 바로 위쪽에 닿는다. 그녀는 자신의 저택, 제 방에 있는 것과 같은 물건을 눈으로 찾기 시작한다. 그게 없다는 걸 깨달은 뒤, 몸을 일으킨다. 탁자 위, 선반 안. 물건을 올려둘 수 있는 곳은 전부 눈으로 훑는다. 없다. 있어야 할 게 없다.

“십자가가 왜 없지?”

다자이와 아리아의 거주지는 독실한 크리스천 신자가 많았다. 방마다 십자가를 하나씩 두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아리아는 신을 믿지는 않았지만, 제 곁에 십자가가 없는 건 상상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런데 다자이가 내어준 손님방에는 십자가가 없었다. 성모마리아 상도 존재하지 않았다. 마른침을 삼킨다. 아주 당연한 사실을 망각하고 있던 자신을 책망하게 되었다. 문득 의문이 떠올랐다. 다자이가 못 본 사이에 신을 믿게 된 건가? 아닐 거다. 그는 쉽게 타인을 믿지 않으며 실존하지 않는 신을 믿을 인물이 아니었다. 믿지도 않는 신을 향해 맹세하겠다던 모습이 떠오른다. 다자이는 정말 진심으로 믿어도 된다는 말을 한 걸까?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예민해서가 아닐까? 다자이는 나에게 항상, 친절했고, 상냥했는데. 걔가 나 말고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군 적이 있던가? 춥지도 않은데 몸이 떨렸다. 아버지. 아버지를 보러 가자. 그녀는 겨우 벗어났던 자리로 되돌아간다. 이따금 마주치던 사용인들은 아리아의 낯빛을 보고 놀라며 말을 걸어왔지만, 그녀에게 있어 그것은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드레스가 허공에 나풀댄다. 아무것도 없는 바닥에 몇 번이나 걸려 넘어질 뻔하길 반복하며 다다른 연회장 앞에서 숨을 가쁘게 내뱉는다. 노크도 없이 문을 열자 말소리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아리아?”

양아버지는 그녀를 보며 눈을 크게 떴다. 아리아의 모습을 보며 놀라더니 그녀에게로 황급히 다가간다. 다자이는 아리아를 보며 친음하더니 뒤늦게 남자에게로 걸어갔다. 아무래도 많이 예민한 모양이네요. 아까도 안정이 필요할 거 같아서 방에서 쉬라고 말했었는데……. 걱정스러운 말은 느리게 이어진다. 그는 아리아를 힐끗 바라보다가 남자의 등에 손을 얹는다.

“제가 괜한 부탁을 한 모양이에요. 죄송할 따름입니다.”

면목이 없군요. 안타깝다는 듯 미간을 좁히는 모습이 가증스럽게 느껴졌다. 너, 너는 신도 안 믿으면서…… 나한테……! 아리아는 그의 양부가 이해하지 못할 말을 한다. 흐트러진 머리카락. 구겨진 드레스 자락과 십자가나 성모마리아상을 찾느냐 가구에 부딪힌 탓에 푸르게 물들어가는 피부. 그는 아리아를 보고 한숨을 내쉰다. 아무리 딸에게 유하다고 한들 용납할 수 있는 정도가 있는 법이었다. 지금 딸의 모습은 흑사병에 걸려 죽음을 기다리는 자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광증에 가까운 모습에 양부는 결국 아리아에게 다가가 묻는다.

“다자이 군과 무슨 일이 있었니?”

“아버지. 이제야 고백하는 거지만…… 정말, 진심으로, 신에게 맹세코 범인은 다자이에요.”

“대체 뭘 말하는 거니, 아리아.”

“다자이가, 릴리아나도, 폴도, 그리고 기어코 제 수양부도 죽인 거라구요.”

쟤는 맥스도 죽였어요. 제가 아버지께 선물 받은 황금색 털을 가진 그 작은 강아지요. 양아버지는 그녀의 말에 표정을 굳힌다. 그리고 등을 돌려 다자이를 바라본다. 그의 행동과 그로 인해 만들어진 얄팍한 희망에 아리아의 낯빛이 아주 조금 밝아졌다. 아버지는 날 믿어주실 거야. 일찍이 말하지 않은 내가 바보였어. 아버지가 믿어주신다면, 아버지는 다자이를 혐오하고 경멸하며 이 저택에서 벗어나 우리 집으로 돌아가겠지. 모든 인연을 정리하고 나는, 다자이를……. 양부는 다자이에게 허리를 굽힌다. 그것을 본 아리아의 표정이 굳어진다. 그녀는 아버지? 하고 양부를 부른다. 그는 드물게 화를 참아내는 듯한 목소리로 아리아의 말에 대답한다.

“조용히 하거라, 아리아.”

“아버지. 아버지는 제 말을 믿어주셔야죠. 아버지이.”

“조용히 하라니까.”

“아버지!”

양부는 아리아의 말에 더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에 머리를 더 깊이 숙인다. 미안하네. 다자이 군. 자네의 수양부가 죽고 마음이 심란할 터인데 내 딸까지 나서선……. 그러자 다자이는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이 곤란스레 웃으며 손을 내젓는다. 이렇게 고개 숙이시면 안 됩니다. 직위도 있으신 분께서……. 마음에도 없는 말을 아주 쉽게 내뱉고서 아리아를 흘겨본다. 눈이 마주칠 때면 다자이의 눈웃음이 더 짙어졌다. 사그라든 갈색 속에 빛은 존재하지 않았다. 번들거리는 눈동자 속에는 절망한 아리아가 담겨있다.

“다자이 군의 말대로 딸이 광증이 있는 모양이야. 진작 의원에게 가볼 걸 그랬군.”

“시술이 무척 거칠다고 들었습니다. 아리아는 몸이 약하고 유약하니 감당할 수 없겠죠. 괜찮습니다. 저랑 아리아는 친구니까요.”

“아리아. 다자이 군은 널 이리도 신경 써주는데 그렇게 말하면 못 쓴다.”

“아버지.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신 거예요?”

“자네의 편지에 적혔던 대로군. ……하아. 저택으로 돌아가는 건 좀 미뤄야겠어.”

“아리아에게 내어준 방은 경관이 무척이나 훌륭한 곳이니 안정에도 도움이 될 겁니다. 사용인들에게 휴가를 주어서 낯선 사람과의 접촉을 최소화하면 상태가 호전되는 데에 도움이 되겠지요.”

“정말 고맙네. 내 딸을 이리도 신경 써주어서. 거기. 누구 있나?”

다자이가 조금 목소리를 높여 사용인을 부른다. 애니와 톰은 안으로 들어와 고개를 숙이고 있다. 그는 아주 익숙하게 타인에게 명령한다. 아리아 양이 아무래도 많이 지친 모양이야. 방으로 데려다주고, 밖에서 문을 잠그도록 해. 함부로 나다니는 일 없게 만들고. 일이 다 끝나면 일주일 동안 휴가를 가도록 해. 이해했나? 다자이의 말에 애니는 아리아의 팔을 잡는다. 톰은 그녀의 어깨를 감싸안고서 억지로 몸을 일으킨다. 아버지, 아버지? 아리아는 애처롭게 그의 양부를 부른다. 양부의 입술이 벌어진다. 그리고 다시 윗입술과 아랫입술이 맞닿는다. 아리아의 안색은 창백하기 그지없다. 마치 부모에게 버림받은 존재처럼 연신 아버지, 하고 그를 불러댄다. 생각이 복잡하다. 얇은 실처럼 이루어진 것들이 한데 뒤섞여 꼬이더니 곧 끊어진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다. 떠오르는 의문 또한 끊이질 않았다. 하지만, 아리아는 그중에서 가장 알고 싶은 것을 묻기로 했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지금, 당장 떠오른 의문에 대한 대답을 들어야 할 거 같았다.

“하나만, 제발 하나만 대답해주세요.”

“무엇이니. 아리아.”

“……다자이는 신을 저희의 아버지를 믿지 않는 게 맞죠?”

그런 게 맞지요? 그녀의 목소리가 안쓰러울 정도로 잘게 떨렸다. 양부의 낯에 의문이 서린다. 그는 다자이를 바라보다가 시선을 아리아에게로 돌렸다. 아리아. 무슨 소리를 하는 거니. 아리아는 생전 처음 겪어보는 의문과 절망과 부피가 큰 공포를 앞에 둔 것만 같았다. 아버지의 입을 두 손으로 틀어막고 싶다. 그러지 않으면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사실이 부정당할 것만 같아서…… 과거의 시간을 전부 의심하게 될 것만 같아서……. 아리아는 자기 자신을 의심하고 싶지 않았기에 그의 입을 틀어막고 싶어 속박된 손을 몇 번이나 움직였다. 아가씨. 그러시다가 다치십니다. 애니가 나지막이 속삭인다. 자신의 비위를 맞추려던 애니는 다자이의 말 하나 때문에 제 손과 손목을 힘주어 잡고 있다.

“다자이 군은 너와 다르게 매일 아침과 밤마다 성당에 나가 미사를 들을 정도로 헌신적인 신자란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광증에 사로잡히면 본래 기억이 훼손되곤 한다고 하더군요. 아리아를 이해해주시길 바랍니다. 그녀 또한 광증에 걸리고 싶어 걸리진 않았을 테니까요.”

“아리아. 다자이 군의 말 따라 방에 들어가서 안정을 취하도록 하렴. 기도하거라. 죄를 사해달라고, 광증이 낫게 해달라고.”

“저는 정상이에요. 아버지.”

“보통 광증 환자가 그렇게 말하곤 하지. 나도 이러고 싶지는 않았단다.”

“애니. 아리아의 증상이 심해지기 전에 빨리 방으로 안내해주도록 해.”

“네, 알겠습니다. 주인님.”

애니와 톰에 의해 연회장에서 끌려가는 내내 아리아는 아버지라는 호칭을 외쳐댔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미적지근한 액체가 뺨을 적셨다. 이 모든 게 다자이 때문이다. 그가 아버지를 어떻게 설득한 건지 모르겠지만, 아버지는 지금 다자이에게 속고 있다. 아아, 아버지. 걔는 사탄이에요. 예수를 판 유다보다 더 악질이에요. 아버지. 다자이를 믿으시면 안 돼요. 아버지. 아버지! 아, 빌어먹을 다자이. 망할 놈. 너는 분명 지옥에 갈 거야. 신의 은총도 받지 못하고 지옥에 갈 거라고! 아리아의 말이 길어질수록 양부는 얕은 신음을 흘린다. 마른세수를 연거푸 하는 남자를 내려보며 다자이는 웃고 있었다.

“아리아는 분명히, 확실하게 좋아질 겁니다. 걱정하지 말고 편히 쉬세요.”

“고맙네. 다자이 군. 정말로 고맙네.”

“제가 부족한 탓에 아리아의 병세가 심해진 듯합니다. 제가 잘 돌볼 테니 너무 심려치 마시고요.”

아리아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졌다.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아버지는 무슨 말을 하고 계신 걸까. 다자이는 또 무슨 말을 하는 거고. 그녀는 작금의 상황을 아예 이해할 수 없었다. 받아들일 수조차 없었다. 그녀는 넋을 놓은 채로 애니에게 말한다. 애니. 네가 봐도 내가 이상해? 그러면 애니는 침묵을 지킨다. 그녀는 톰과 함께 아리아를 끌고 십자가도 성모마리아상도 없는 그 방 안으로 들어간다. 그녀를 소파에 앉힌 뒤에야 입을 떼어낸다.

“……쉬시면 괜찮아질 거예요. 도련님의 말대로요.”

불쌍한 아가씨. 예전에는 이러지 않으셨는데. 애니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톰과 함께 밖으로 나간다. 문이 서서히 닫힌다. 걸쇠가 걸리는 소리가 났다. 아리아는 뒤늦게 소파에서 일어나 문 앞으로 걸어간다. 손잡이를 감싸 잡고서 위아래로 움직여본다. 문이 열리지 않았다. 다자이가 원하는 것을 아리아는 일평생 알 수 없을 것이고, 알고 싶지도 않았지만…… 아리아는 알 수 있었다. 지금, 자신은 다자이가 바라는 대로 되어버렸다고. 다자이가 만들어낸 덫에 완벽히 걸려버렸다는 걸 깨닫는다. 손톱을 세워 문을 긁어댄다. 거기, 거기 누구 없어? 문 좀 열어줘. 제발……. 아리아는 미치지 않았다. 광증에 걸리지도 않았으며 명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을 정도로 이성적이다. 그런데, 내가 이성적이긴 한가? 다자이의 말 따라 내가 광증에 걸린 거라면? 손이 아래로 툭 떨어진다. 목덜미가 서늘하다. 팔뚝에 소름이 오소소 돋고, 식은땀이 뚝뚝 떨어진다. 아랫입술을 이로 씹어대며 열릴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문을 바라본다.

“아니야. 난 안 미쳤어.”

단언컨대 미쳐있는 것은 다자이다. 나는 미치지 않았고, 광증에 걸리지도 않았다. 유달리 예민하게 군 것은 이곳이 다자이의 저택이니까. 내가 언제 살해당할지 모르니까. 릴리아나처럼. 맥스처럼. 폴처럼. 누군가에게 시체로 발견될 것만 같아서. 그래서, 불안해서……. 생각이 길어질수록 날카로운 의심의 끄트머리는 자신을 향해간다. 두 손으로 뺨을 감싼다. 속이 울렁거리고 어지러웠다. 먹은 것도 없는데 속에 든 모든 걸 게워 내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인다. 아리아는 입안의 얇고 여린 살을 씹어가며 그 충동을 참아낸다. 토해내면 안 된다. 이상한 모습을 보여서도 안 된다. 조금이라도 호전되지 않은 모습을 보인다면 이 방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어날 거라는 걸 쉬이 예상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동시에 가져선 안 될 의문과 그로 인한 불안이 피어나는 것이었다. 상태가 호전되는 걸 판단하는 게 다자이라면? 그러면 내가 여기서 나갈 수나 있나? 나가더라도, 아버지와 이전처럼 지낼 수 있을까? 만약 근래 생긴 광증에 대한 수술을 받게 된다면 어떡하지? 손이 잘게 떨려왔다. 왼손으로 오른손을 힘주어 잡는다. 불안과 의문은 끝없이 크기를 키워간다. 하지만 아리아를 위태롭게 만드는 것은 따로 있었다. 만약에 다자이가 오로지 진실만을 말해온 거라면? 나는 정말 광증에 시달리고 있는 걸까? 나는 미쳐있는 걸까? 아니면 이미 미친 걸까?

사실, 다자이의 말이 옳은 게 아닐까?

몸에 힘이 풀린다. 바닥에 주저앉아 피처럼 붉은 카펫을 내려본다. 고개를 천천히 들다가 문에 있는 흠집을 보고 헛웃음을 터트린다. 죄수에게 식사를 배급하는 것처럼 열 수 있는 배식구를 보고 아리아는 고개를 뒤로 젖힌 채로 웃을 수밖에 없었다. 다자이. 빌어먹을 다자이. 날 망치기 위해 존재하는 새끼. 빌어먹을 놈. 넌, 너는 정말……. 울분에 찬 목소리가 방에 가둬지지 못하고 문 틈새로 빠져나간다. 아리아는 이제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많은 걸 신경 쓰고 싶지도 않았다. 나 자신에 광증에 걸렸는지도 아닌지도 판단하기 힘들었다. 그녀는 단지 그녀 자신을 이렇게 만들어둔 다자이가 원망스럽기 짝이 없었다. 손가락을 안으로 말아쥔다. 길이가 짧지만은 않은 손톱이 손바닥의 살을 찔러댄다. 그 얕은 통증은 지금 아리아의 상황이 현실임을 일깨워주었다. 열이 올라 홧홧한 뺨과 달리 몸은 차게 식어만 갔다. 아리아는 갈라진 목소리로 작게 다자이를 불러댄다. 원망하기 위해서. 똑같이 망치고 싶어서. 그리고 자신을 이렇게까지 만든 이유를 알고 싶어서. 입을 떼어낸다. 다자이. 그의 성을 부른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아리아는 그제야 고독함에 집어삼켜진다는 표현을 이해할 수 있었다.

 

 

 

 

여자의 세계는 방과 창살 사이로 보이는 작은 정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나가고 싶다는 열망 하나로 창을 열고 뛰어내린 탓에 창살이 달려 잘 보이지 않게 되었지만, 아리아는 그 희미한 빛과 좁은 풍경을 매일 유심히 살피곤 했다. 마치 그게 밖과 자신을 연결해주는 유일한 수단인 것처럼 굴었다. 얇은 틈새로 보이는 풍경은 언제나 같았다. 평온했고, 평화로웠으며 아리아가 없어도 모든 게 순리대로 흘러갔다. 정원사가 심어둔 프리지아는 바람이 불어올 때면 옆으로 기울었다가 제 자리를 찾았고, 그걸 볼 때면 정원으로 내려가 향긋한 프리지아의 냄새에 파묻히고 싶었다. 정원이 아니더라도 괜찮았다. 이 답답한 방에서 빠져나갈 수만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다자이로 인해 완벽하게 믿지 않고 필요할 때만 찾던 신에게 하루도 거르지 않고 기도하라 하면 할 수 있었다. 신을 배반하고 사탄을 믿으라면 그럴 수도 있을 거 같았다. 악마나 마녀의 발등에 입을 맞추고 그들이 믿는 교리를 읊으라면 읊을 수도 있다. 좁지도 넓지도 않은 방 한 칸에서 아리아는 많은 생각을 하고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를테면, 광증에 대한 의심. 평온하기 짝이 없는 일상에 스며들지 못하는 것은 내가 아닐까, 하는 자책.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그리움. 길게 이어지던 생각의 끝은 매번 똑같은 것에 다다른다.

“다자이.”

이제는 어색하지 않은 이름을 발음할 때면 그녀는 스쳐 지나온 과거를 입에 머금게 된다. 유순하기 짝이 없는 미소를 머금은 채로 릴리아나는 내가 죽였어, 하고 속삭이던 소년. 초상화를 그릴 때, 뒤에서 손을 잡던 불쌍한 남자애. 다자이는 수양부에게 거둬지기 전, 힘들게 살아왔으니 많은 걸 네가 알려주라던 아버지의 말. 이따금 눈이 마주칠 때, 빛 한 점 고여있지 않던 짙은 갈색의 눈동자. 아리아는 이 모든 게 다자이로 인한 것만 같았다. 그래서 사냥에 돌아온 다자이를 창문 너머로 바라볼 때면 엽총에 맞아 죽은 게 사슴이 아닌 그 남자이길 간절히 바랐고, 또 기도했으며, 그런 주제에 죽은 다자이는 상상할 수 없었다. 축 늘어진 손과 창백한 피부. 두 눈을 감고 있는 남자가 관 속에 얌전히 누워있는 걸 아리아는 상상하고 싶어도 몇 번이나 상상하려고 했었음에도 그 모습을 그려낼 수가 없었다. 릴리아나가 목을 매고 죽은 나무에 목을 매려고 했던 소년을 몇 번이나 눈에 담았었는데. 아리아는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어서…… 이따금 조금 비참해졌다.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든다. 앞에는 다자이가 앉아있다. 굳게 닫혀 있던 문은 활짝 열려 있었음에도 뛰쳐나가 도망가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고, 의지조차 생기지 않았다. 학습된 무기력함에서 비롯된 걸까. 아리아는 알 수 없었다.

“그간 잘 지냈나?”

“아니. 못 지냈어. 무척이나.”

“그건 아쉬운 일이지. 광증은 좀 나아졌고?”

“난 미치지 않았어. 다자이. 너도 알잖아. 너도, 네가 제일 잘 알면서…….”

다자이는 턱을 괸 채 웃는다. 둘이 가운데에 두고 있는 탁자 위에는 구색을 맞추기 위한 차나 다과도 놓여있지 않다. 손님이 오면 차나 다과를 내와야 한다는 예법도 잊은 거야, 아리아? 다자이의 목소리에 웃음이 묻어난다. 내오지 못하는 상황이란 걸 본인이 가장 잘 알면서 저리 말하는 게 악질적이었다. 아리아는 이제 타인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의 위치를 높이기 위해 배운 예법을 다자이에게 보이지 않는다. 불쾌함을 담아내어 인상 쓰자 다자이는 장난이라며 손을 내젓는다.

“친우끼리 장난 좀 칠 수 있지. 내가 조금 짓궂었던 건 인정하겠다만.”

“왜 온 건데. 내보내 주려고?”

“아리아. 난 네게 나가지 말라고 단 한마디도 한 적이 없어. 자, 봐. 문이 열려 있지 않나. 나가고 싶다면 편히 나가도 좋아.”

손가락이 안으로 말린다. 내가, 나가도 되나? 떠오른 의문에 아리아의 낯빛이 희게 질린다. 그녀는 곧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할 변명거리를 찾기 시작한다. 네가 문에 걸쇠를 걸었잖아. 내가 모를 줄 알아? 다자이의 고개가 옆으로 기울어진다. 그는 눈동자를 느리게 굴리며 아리아의 모습을 훑는다. 그러더니 고개를 돌려 반쯤 열린 방문을 본다. 하하, 하하하! 다자이는 뭐가 그리 유쾌한지 소리 내어 웃기 시작한다. 가증스럽기 그지없다. 만약 손에 석고로 만들어진 성모마리아 상이 있었다면 흰색의 석고가 붉게 물들 때까지 그의 머리를 내리찍었을 거다. 숨이 서서히 가빠진다. 분노와 이유 모를 불안이 뒤섞여 호흡을 가쁘게 만들었다.

“너도 알고 있잖아. 아리아.”

“난 아무것도 몰라. 네가 가뒀으니까.”

“네가 정원으로 떨어졌을 때, 나는 네 방의 걸쇠를 풀어두었어. 마음만 먹었다면 당장 나올 수 있었을 거야.”

“……그걸 내가 어떻게 아는데.”

“내가 방 앞을 지나갈 때면 넌 문에 귀를 대고 있었으니까. 모를 수가 없지.”

왜 그렇게 멍청해졌어, 아리아. 광증에 걸리면 다 그런 걸까. 내가 돌봐주길 바라? 꼬아진 다리에 시선을 둔다.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불안하고, 두려웠다. 이유도 모를 공포가 아리아의 발을 적시고 있다. 그는 아리아를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괜찮아. 이제 다 끝났으니. 너도 내가 사냥에 돌아온 걸 보고 문을 열어준 거 아니야? 다자이에게선 옅은 화약 냄새가 났다. 그리고, 향수. 익숙했으나 누구의 것인지 이제 기억나지 않는 향수의 냄새가 은은하게 풍겼다. 그녀는 잠시 잊고 있던 의문을 입에 머금는다.

“아버지는?”

“연회장에 계셔.”

“내 상태에 대해 알고 있으셔?”

“그럼. 네가 비록 입양됐지만, 넌 그의 하나뿐인 딸이잖아. 그땐 네 상태가 좋지 않으니 내색하진 않으셨지만, 널 무척이나 걱정하셨었어.”

“정말로?”

“그럼. 정말로. 만나러 갈래?”

“그래도 돼?”

“그러지 못할 건 어딨겠어. 넌 내 친구고, 네 아버지의 딸인데.”

다자이가 일어선다. 아리아는 그가 완전히 의자에서 일어난 뒤에야 따라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다자이의 옆에 서지 않고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붉은 노을이 내려앉은 복도. 길게 늘어진 그림자가 겹치며 색이 짙어진다. 저택은 왜 이렇게 조용해? 아리아가 물으면 다자이는 얕은 한숨을 내뱉는다. 기분이 안 좋은 걸까. 괜한 걸 물어본 건가. 아리아는 그녀가 갇혀있던 방을 곁눈질한다.

“휴가를 떠났어. 다들.”

“그렇구나.”

“광증에 사로잡히면 시끄러운 것보다 정적인 것이 좋다고들 하니까.”

“……그렇긴 하지.”

“좋지 않은 기억은 잠시 잊고 과거의 이야기나 해볼까. 어때.”

활짝 열린 창문을 통해 바람이 불어올 때면 다자이와 아리아의 머리카락이 허공에 넘실댔다. 다자이는 자신의 광증에 대해 알고 있다. 어릴 적 일에 관한 대화를 나누면 아주 미약한 단서라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좋아. 그렇게 하자. 아리아가 순순히 대답하자 다자이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더니 그는 한 그림 앞에 멈춰 선다. 아리아의 가족과 다자이의 가족이 함께 그려진 초상화. 유화로 그려졌으나 잘 관리되지 않아 세월의 흔적이 여실히 느껴지는 그것에 시선을 둔다. 초상화를 그렸을 때 말이야……. 다자이가 말의 운을 뗀다. 아리아의 얄팍한 신경이 그의 목소리에 닿는다.

“나는 덧없이 불쾌해서 참을 수가 없었어.”

“고작 초상화잖아.”

“모든 관계가 거짓되었으니 불쾌했던 거야.”

“그래도 네 수양부는 널 사랑하셨어.”

“그 사랑마저 거짓일 거란 생각은 해본 적 없어?”

“내 아버지가 날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은 거야?”

“왜 그렇게 되는 건지는 모르겠는데.”

난 그저, 이 안에 진실 된 관계가 단 하나라도 있냐고 묻고 싶은 거야. 아리아는 그제야 초상화에 그려진 사람들의 얼굴을 눈에 담는다. 아리아는 제 양부와 양모를 닮지 않았고, 다자이는 제 수양부와 수양모를 닮지 않았다. 입양되고 거둬진 아이들이기에 당연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완벽한 타인을 온전히 닮은 것이 오히려 더 소름 돋지 않나? 아리아는 손가락을 꼼지락댄다. 다자이는 그림 앞으로 걸어가 우둘투둘한 유화를 손톱으로 긁어댄다.

“저기서 내가 진실로 만들어낸 관계는 너밖에 없는걸.”

“그렇구나.”

“너도 그렇지, 아리아?”

“……뭐.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릴리아나 말이야. 기억하지?”

“기억하지. 잊을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사실 릴리아나는 널 시기했던 거 알고 있어? 싫어했었다고 해야 할까.”

“릴리아나가?”

“너 대신 자기가 거둬져야 했다며 나에게 매번 말했었어.”

다자이의 말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릴리아나는 언제나 내 머리를 빗겨주었고, 드레스를 골라주고 입혀주었는데. 아가씨, 하고 부를 때면 유순하게 웃으며 그녀에게 달려드는 날 품에 안아주었는데. 그런 릴리아나가, 나를 싫어했다고? 입을 겨우 벌린다. 그럴 리가 없어. 릴리아나는 날 좋아해 줬어. 좋아했단, 말이야……. 말라붙은 유화 물감을 갉작이던 행동을 멈춘다. 다자이는 아리아를 바라본다. 웃는 낯으로 고개를 기울이며 묻는다.

“확신할 수 있어?”

지겨울 정도로 어쩌면 짜증이 날 정도로 말을 이어가던 다자이는 그 물음 하나를 던져놓고서 등을 돌린다. 그는 다시 연회장을 향해 걸어간다. 아리아는 뒤따라 걸으며 릴리아나를 떠올린다. 자신을 바라보면 꼬리를 흔들던 맥스를 생각한다. 정원을 돌아다니다가 마주칠 때, 손을 흔들어주던 폴을 생각한다. 다자이의 말이 계속 머릿속을 떠다닌다. 나는 그들의 애정이 진실 되었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 만약에 거짓이라면 아버지는, 아버지는 날 정말 진실 되게 사랑했을까? 사랑한다고 속삭여주시며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그 손길에 귀찮다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았었다고 단언할 수 있나? 아리아의 걸음이 점차 느려졌다. 뒤에서 들려오던 구두 소리가 불규칙하게 느려지자 다자이는 그녀를 따라 걸음을 늦춰주었다. 내가 비정하다고 느낄 수 있겠지. 아리아. 이해해. 하지만 나는 널 정말 아끼고 좋아하고 있어. 진심으로. 나지막이 내뱉은 말이 고요한 복도에 내려앉는다.

“과거 이야기를 하면 이게 싫군. 말이 쓸데없이 길어지잖아.”

“뭐 어때. 어차피 넌 매번 말이 길었어.”

“하하. 함께 할 식사에서도 말을 길고 아주 장황하게 할 텐데 괜찮나?”

연회장의 문 앞에 선 남자는 이 저택 안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것을 돌아본다. 아리아는 화려한 장식이 다 떨어져 나가고 사슴 머리 박제가 걸렸다는 걸 이제야 알게 되었다. 다자이. 저건 뭐야? 아리아의 물음에 그는 그녀의 시선이 닿은 곳을 바라본다. 저게 그리도 신경 쓰였어? 네 아버지가 사냥한 사슴이야. 뿔이 무척이나 보기 좋게 자라나 있어서 머리만 잘라내 박제로 만들었지. 그는 연회장의 문을 아주 느리게 연다. 요즘 박제사들은 아주 솜씨가 좋아. 털에 상처 하나 나지 않았더라니까. 다자이는 익숙하게 아리아를 연회장의 안으로 안내한다. 마치 집사라도 된 것처럼 아리아의 곁에 딱 붙어 서서 장난스레 웃는다.

“가리는 음식이 있으신가요. 아가씨.”

“징, 그러워.”

“너무하군. 가벼운 유머를 즐겨두는 게 좋아. 너무 힘들 때, 유머러스하게 넘기면 조금은 나으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삶에 도움이 되는 아주 유익한 소리이다만.”

“필요 없어. 그런 거. 빨리 식사나 하고 저택으로 돌아갈래. 아버지는?”

“아. 요리를 도와주고 계셔. 애피타이저가 뭔지 궁금하지 않나?”

“메인만 줘.”

“그렇게 하지. 잠시만 기다려.”

다자이는 연회장과 연결된 식당의 문으로 걸어간다. 문이 열리며 아리아가 맡아본 적 없는 음식의 냄새가 연회장 안을 가득 채운다. 향신료를 잔뜩 넣은 음식인 걸까? 향신료 특유의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냄새가 점막에 달라붙는다. 인도에서 난 향신료인가? 요즘은 중국에서 난 향신료도 비싼 값에 팔고 있다고 들었던 거 같긴 한데……. 애초에 어떤 동물의 고기를 사용한 거지? 이건 물어보는 게 좋겠다. 그리고, 그걸 물어보면…… 그 좋은 고기를 아버지와 함께 먹고 싶다고 말해야지. 그러면 다자이가 아버지를 모시고 와서 대화를 나누게 해주지 않을까? 검지로 식탁보가 깔린 식탁을 톡톡 두드린다. 규칙적인 소리가 귓등을 간질인다. 그러고 보니까, 내가 왜 다자이의 행동을 기다리고 있는 거지? 아니, 아니다. 이런 생각을 가져선 안 된다. 아버지는 그 방에서 날 꺼내주지 않으셨지만, 다자이는 날 꺼내주지 않았던가. 일종의 신뢰로 비추어진 그 행동을 배신하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그렇게 믿고 싶은 걸지도 모른다.

“오래 기다렸지?”

다자이는 아리아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고 싶지 않다는 듯 금방 음식을 담아 내왔다. 스튜 그릇에 한가득 쌓인 고기와 듬성듬성 보이는 채소가 눈에 띄었다. 그릇이 앞에 놓이고, 예법의 순서 따라 스푼이나 포크, 나이프 따위가 옆에 나란히 정렬된다. 모든 걸 끝낸 다자이는 아주 자연스럽게 아리아의 맞은편에 앉는다.

“이거 무슨 고기야?”

“내가 이전에 했었던 말, 기억해?”

“……사냥?”

“맞아. 사냥. 오늘 사냥할 때, 아주 좋은 걸 잡았거든. 네게 맛보여주고 싶었어. 맛이 이상하진 않을걸. 아마도.”

“아마도는 뭐야.”

“누군가에게 대접하기 위해서 요리를 해본 건 처음이라서 말이야. 맛이 조금 부족하더라도 너른 마음으로 이해해주었으면 해.”

“이상한 거 넣은 건 아니지?”

“내가 약이라도 탔을까봐?”

“매운 향신료를 많이 넣었을 거 같아서.”

“그럴 리가. 소금과 후추만 조금 넣었으니 편히 먹어.”

떨떠름한 표정으로 스푼을 손에 쥔다. 그릇 속에 스푼을 담가 국물을 조금 떠 입에 넣는다. 첫입은 썼다. 짜고, 매웠고, 조금 달기도 하고. 육류에서나 느낄 수 있는 누린내가 느껴졌다. 미간을 찡그리자 다자이는 느리게 입을 떼어낸다. 계속 먹어. 원래, 막 도축한 짐승은 누린내가 심한 법이지. 그렇다고 해서 물에 넣어 핏물을 빼는 건 무척이나 아까운 일이야. 그러면 육향이 줄어들거든. 참고 몇 입만 더 먹어봐. 그러면 분명, 맛있게 느껴질걸? 다자이를 곁눈질한다. 그의 표정에 악의는 없다. 완벽한 선의와 호의로 만들어진 행동을 불안해할 이유는 이제 없다고 믿고 싶었다. 이거만 먹고, 아버지를 만나서 저택으로 돌아가면 된다. 다자이에겐 미안하지만…… 이전처럼 지내는 건 힘들 거 같다고 편지를 보내고. 그러면, 나는……. 아리아는 큼직하게 잘려있는 고기를 앞접시에 덜어 나이프로 잘라내었다. 유독 질긴 고기가 잘 잘리지 않을 때는 다자이가 아리아의 손에 들려있던 나이프와 포크를 사용해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내 주었다.

“이거 진짜 무슨 동물인지 안 말해줄 거야?”

아리아가 묻자 다자이는 그녀 몫의 접시를 앞으로 밀어주며 말한다.

“다 먹으면 알려줄게.”

“굳이?”

이해할 수 없어 미간을 살짝 좁힌 채, 고기를 내려본다. 역시 이상한 동물의 고기인 건가. 사람을 먹은 곰이나 오지에서 나는 악어 같은 거…… 그런데 여기에 곰이 살긴 하나? 애초에 오지도 없는 지역인데. 음식을 먹지 않고 생각에 잠긴다.

“어떤 동물인지 다 먹고 알면 재미있을걸.”

“힌트라도 줘.”

“힌트라…….”

다자이는 눈동자를 옆으로 굴린다. 턱을 괸 채로 흐음, 하고 작게 콧소리를 낸다. 어떤 걸 힌트로 주면 좋을까. 그는 연회장에 크게 난 창밖에 시선을 둔다. 그리고 입을 닫았다. 길게 이어질 수도 있는 생각을 중간에 끊어내고 싶진 않았기에 아리아도 덩달아 침묵을 입에 머금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아리아의 시선은 다자이를 따라 움직인다. 그가 손을 올리면 손을 바라보았고, 시선을 돌리면 그 끝에 눈을 두었다. 그게 당연하다는 듯 굴 때면 다자이는 킥킥 웃어댔다. 뭐가 그리 즐거워서 저렇게 웃는 걸까. 아리아의 표정이 퉁명스러워지자 다자이는 입을 살짝 가렸다.

“네게 줄 만한 힌트가 생각났어.”

“뭐야. 그게.”

“네가 아주 친숙하게 여겼을 생물이야.”

“이거 설마 개야?”

“그건 너무 잔인하지. 물론, 먹을 게 없어 개를 먹는 사람들은 있지만.”

“잘 아는 것처럼 말하네.”

“내가 그랬으니까.”

“어?”

“개만 먹었겠어? 구더기가 달라붙은 쥐의 사체도 먹어본 적 있어.”

다자이는 아침 인사를 건네는 것처럼 아주 태연하게 말한다. 아리아. 너는 그런 적이 없지? 수도원에서 운영하던 고아원에서 자랐었으니까. 죄책감을 느낄 이유는 없다. 아리아는 다자이에게 있어 가해자가 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에 그에게 연민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녀는 그에게 한없이 죄스러워졌다. 고개가 아래로 내려간다. 무어라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아랫입술을 몇 번이나 씹었다. 난 수양부에게 거둬지기 전까지 죽은 것들이나 먹으며 겨우겨우 생을 연명하곤 했어. 다자이는 아리아가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개의치 않는다는 것처럼 말을 이어갔다. 그는 아주 먼 과거를 떠올리는지 아스라이 먼 곳을 바라보고 있다. 다자이는 지금 뭘 바라보고 있는 걸까. 어떤 걸 떠올리고 있는 걸까. 아리아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그의 과거가 궁금하긴 했지만, 귀를 틀어막아 듣고 싶지 않기도 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판도라의 상자가 존재한다면 그건 분명 다자이가 손에 들고 있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내가 먹었던 것 중에 최악인 음식이 뭐일 것 같아?”

“남이 버린 음식이겠지, 뭐.”

“그건 아주 좋은 식당에서 맛볼 수 있는 만찬과 다를 게 없었어. 아리아. 난 죽은 쥐도 먹었었으니까.”

“내가 어떻게 알아. 너랑 만난 건, 네가 네 수양부에게 거둬진 뒤인데.”

“맞춰보라는 뜻이었어.”

목덜미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힌다. 불어오는 바람도 없는데 몸이 유독 찼다. 아리아는 다자이의 말을 흘려듣기 위해서 스푼을 꽉 쥐었다. 그리고 스튜 그릇 안에 담긴 음식을 헤집었다. 신경 쓰지 않으면 그릇 밖으로 넘칠 거 같은 고기를 헤집을 때면 잔뼈가 보였다. 소동물이라기엔 굵고, 곰 같은 육식 동물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얇은 뼈는 그녀의 생각보다 잘 부러졌다. 내가 먹은 것 중에 가장 최악이었던 음식은 나와 같은 사람이었어. 병에 걸렸었나. 굶어 죽었던가. 기억은 나지 않는데. 누군가가 나를 흔들어 깨웠고 잠결에 먹은 음식이 그거였거든. 거기선 신기한 맛이 났어. 음식을 뒤적이던 걸 멈춘다. 다 익어 갈색으로 변한 고기와 듬성듬성 부러진 흰 뼈 사이로 무언가가 보인다. 둥근 거 같기도 하고, 각져있는 거 같기도 하고. 조금 누렇지만 때가 벗겨진 것처럼 흰 무언가……. 이게, 뭐지? 스푼에 그것을 담는다. 국물을 덜어낸다.

“쓰고, 짜고, 맵고, 단 거 같은데…… 누린내가 나더라고. 그거에선.”

아리아는 스푼의 안에 담긴 것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건 아주 익숙한 것이었다. 유치를 뽑고서 이빨 요정에게 주기 위해 베개 아래에 넣어두었던 기억. 사람이 웃을 때마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보이던 것.

“아까, 거기 들어간 게 어떤 고기인지 물어봤었지.”

다자이가 웃는다. 다자이는 괴고 있던 턱을 떼어내고서 아리아의 두 눈동자를 직시한다. 떨어져 나온 작은 감정 파편조차 놓치지 않겠다는 것처럼. 그녀가 진실을 알게 된 순간을 조금이라도 더 바라보겠다는 듯이. 눈도 깜빡이지 않은 채로 아리아를 바라보고 있다.

“나는 사람도 동물이라고 생각하는 편이야. 넌 어떻게 생각하지?”

“……아버지. 아버지는 어디계셔?”

“이런. 아리아. 그렇게까지 멍청해진 거야?”

참 안타까운 일이군. 혀를 끌끌 차는 남자와 눈을 맞추며 아리아는 수저를 바닥으로 집어 던진다. 아버지는 어디에 계시는 건데. 지금 만나러 가야겠어. 그리고 돌아갈 거야. 저택으로. 내 집으로. 여기가 아니라, 거기로 갈 거야. 그러니까…… 아버지가 어디에 계시는지 말 좀 해줘. 제발. 손이 잘게 떨려왔다. 다자이는 그 모습을 보고 작게 콧소리를 내더니 아리아, 하고 그녀를 부른다.

“고개 좀 들어봐.”

“싫어.”

“그렇게 계속 보면 수줍어하실 거야.”

“난 그냥 그릇 안을 보고 있는 거뿐이야. 그릇이 감정이 있는 건 아니잖아.”

“그릇을 말하는 게 아니야.”

그 안에 든 걸 말하는 거지. 아리아는 식탁보 위에 떨어진 희지만 누런 이빨을 본다. 그리고, 입술을 달싹인다. 아니지? 아리아의 물음에 다자이는 의뭉스레 웃는다. 그리고 아리아의 앞으로 그릇을 더 밀어준다. 기름기가 도는 고기. 썼고, 짜고, 맵고, 달고, 누린내가 나던 그 질긴 고기. 다자이는 그릇 안에 든 음식을 가리킨다. 셰프의 요리를 소개해주는 사용인처럼 아주 정중하게 깔끔하게. 그렇기에 그가 잔혹하게 느껴졌다. 아리아. 인사해야지. 다자이는 아주 어린 아이에게 처음으로 예법을 알려주는 것처럼 상냥하되 그리 무르지 않은 투로 말한다.

“네 아버지야. 오랜만에 뵙지?”

아리아는 다자이의 말을 속으로 곱씹기만 했다. 내, 아버지? 아버지가 어디 계시지? 고개를 연신 두리번거리자 다자이는 작게 소리 내어 웃으며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아리아의 뒤로 걸어간다. 떨어진 스푼을 주워 그녀의 손에 쥐여주고선 스푼의 끝이 그릇 안으로 향하게 한다. 다자이의 숨이 피부를 간질인다. 그는 여자에게 가까이 붙어 나지막이 속삭인다.

“네가 먹은 고기가 네 아버지야.”

고개를 천천히 옆으로 돌린다. 다자이의 눈동자가 보였다. 호선을 그리고 있는 입술이 벌어졌다가 맞닿길 반복한다. 인사해. 오랜만에 뵙는데. ……보고 싶었지? 그리워했잖아. 매번 밤마다 아버지, 아버지하고 애처롭게 불렀었잖아. 다자이의 손이 아리아의 손등에 얹어진다. 아리아는 그릇에서 남자의 손으로 시선을 돌린다. 희고 모난 부분 없는 손가락은 여자의 손등을 훑는다. 그녀의 피부는 창백하다 싶을 정도로 하얗고, 거친 일을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것을 증명하듯 부드럽기 그지없다. 네 아비는 너와 달리 손이 무척 거칠더군. 그 말에 아리아는 결국 무너졌다. 그녀는 스푼을 손에서 놓치고, 입을 틀어막는다. 입을 다물려고 노력했으나 야속하게도 벌어지기만 했다. 속이 울렁거렸다. 생각은 끊임없이 이어진다. 그러면, 내가 먹은 이 스튜가…… 스튜 안에 든 고기가…… 내 양아버지라고? 눈을 깜빡일 때마다 미적지근한 액체가 뺨을 적신다. 모든 걸 게워 내고 싶었다. 게워 낸다고 한들 그를 먹었다는 사실은 지워지지 않으나, 죄책감은 조금 덜 수 있을 것만 같아서. 위장 속에 담긴 모든 걸 토해내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인다. 그녀는 평소에 그리도 신경 썼던 예법이나 체통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헛구역질한다.

“아버지를 토해내면 못 쓰지.”

위액과 타액으로 범벅된 입가를 닦아내 준다. 아리아는 초점 없는 눈으로 다자이를 올려본다. 그는 평소와 다를 거 없는 평온한 낯짝으로 아리아와 눈을 맞춘다. 왜 그래~? 능청스레 묻는 모습이 한없이 밉살스럽다. 다자이는 마치 아주 친밀하며 가까운 존재에게 가벼운 장난을 치는 것처럼 군다. 식은땀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떼주며 손가락으로 엉성하게나마 빗겨준다. 그 손길은 어딘가 릴리아나와 닮아있어서 아리아는 잠시 향수에 빠진다. 릴리아나는 날 좋아하지 않았으나, 해를 끼치지도 않았다. 하지만 다자이는? 지금 나에게 하는 이 모든 행동과 만들어낸 상황이 호의로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나? 미간이 좁아진다. 눈살을 찡그리면 망막에 맺혀있던 물막이 뺨을 타고 아래로 떨어진다.

“야. 너. 너는…… 내가 싫어?”

아리아는 다자이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다만 그것은 이해할 수 없는 생각에 대한 두려움과 다른 종족에 대한 공포로 다자이 자체를 싫어한다는 것을 뜻하진 않았다. 어쩌면 그녀는 다자이가 언제나 자신에게 호의와 정을 품고 있을 거라고 믿었던 걸지도 모른다. 아리아의 눈물 젖은 물음에 다자이는 눈을 느리게 감았다가 뜬다. 머리카락을 빗겨주었던 손으로 이젠 머리카락을 비비 꼬아댄다.

“싫어한다는 건 말이야. 좋아한다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나?”

이성을 잃을 정도로 타인을 생각하고 있다는 건데. 다자이는 언제나 아리아가 물은 것을 명확하게 대답해주지 않았다. 아리아는 그게 너무나 싫어서, 이번에도 그렇게 구는 다자이가 한없이 원망스러워서…… 그의 손을 쳐낸다. 다자이는 순순히 아리아에게서 손을 떼어낸다. 대신에 그녀 옆에 있는 의자를 빼내 앉는다. 다리를 꼬고서 무릎에 손을 얹는다.

“내가 왜 널 싫어한다고 생각해.”

“싫어하지 않는데 이렇게 한 거면…… 뭐야? 내가 아니라 내 아버지가 싫었던 거야? 네 수양부는 뭔데. 릴리아나는, 맥스는, 폴은!”

“……네가 이해해 줄 거라고 믿었는데. 참 아쉽군. 아쉬워.”

“광증은 네가 걸린 거겠지. 다자이. 내가 아니라.”

“사람은 누구나 조금씩은 미쳐있기 마련이지.”

여유롭기 짝이 없는 얼굴을 보며 아리아는 입술을 달싹인다. 그녀는 결국 고개를 아래로 툭 떨군다. 정돈되지 못한 흰색의 머리카락이 떨어진다. 레이스가 해진 드레스 자락을 쥘 때마다 주름이 자글댄다. 손이 떨렸다. 아니, 손뿐만 아니라 몸이 떨리고 있다. 아리아는 포식자 앞에 선 피식자처럼 굴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스튜 그릇을 힐끗댄다. 숙이지 않으면 저 그릇 안에 담기는 게 자신이 될 것만 같았다. 해체되고, 끄집어내져 무엇 하나 남기지 못하고, 잘린 머리는 식탁을 장식하는 오브제처럼 남아 모든 걸 다자이에게 빼앗기게 될 것만 같다. 아리아는 아버지를 사랑하고 사랑했지만, 그처럼 되고 싶지는 않았다. 죽고 싶지 않았다. 타인에게 먹히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목숨이 고작 타인의 유희적 식사에 소모되길 원치 않는다.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아리아는 초점이 잘 잡히지 않는 눈을 다자이에게 두고서 쥐고 있던 드레스를 놓는다.

“……살려줘. 나 살려줘.”

“난 네게 너를 죽이겠다고 말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는 거로 기억하거든. 아리아.”

“죽이지 마.”

“근데 왜 너는 날 무서워하는 걸까. ……이해할 수 없는 건 아니야.”

다자이는 창백하게 질린 뺨을 엄지로 쓸다가 소리 내어 웃는다. 넓은 연회장에 다자이의 웃음소리가 울린다. 어릴 때는 순수했을 뿐인데, 왜 나이가 들면서 머리가 나빠진 걸까. 넌. 다자이의 피부는 부드러우면서도 단단했다. 어울리지 않는 굳은살이 군데군데 박여있는 탓일까? 아리아는 느리게 눈을 감았다가 뜬다. 그녀는 다자이의 입이 벌어지길 기다리고 있다. 다자이가 말해줄 이유를 듣고 싶었다. 그 말만 기다리며 아리아는 다자이가 마치 성경에 나오는 예수이자 우리의 하나님이라도 된 것처럼 어쩌면 그보다 더 대단한 존재라도 된다는 듯이 그를 올려보고 있다. 그녀는 손을 가지런히 모아 쥔다. 기도하는 것 같으나 간절하게 빌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살려줄 거라고 해줘.”

“살려줄게.”

“죽이지 않을 거라고 맹세해줘.”

“죽이지 않을게. 신에게 맹세라도 해줄까.”

“넌 신을 믿지 않잖아.”

그의 입술은 호선을 그리고 있다. 그러면 뭐에 맹세해줄까. 난 널 죽일 생각이 없고, 계속 살아있는 채로 두고 싶은데. 맹세라도 하지 않으면 넌 매번 나에게 같은 걸 물어볼 거 같으니 네가 원하는 것에 맹세해줄게. 아리아는 다자이에게 무엇이 중요한지 떠올린다. 그의 수양모는 그의 어미가 되지 못했고, 수양부는 그의 손에 죽게 되었으며, 다자이를 퍽 아끼던 유모는 마녀로 몰려 불타 죽었는데. 그 어떠한 것도 다자이에게 소중한 것이 되지 못했는데. 생각이 끝에 다다를 때쯤 아리아는 무언가를 하나 떠올렸다.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임과 동시에 아리아가 절대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말해야 한다. 살기 위해서. 죽고 싶지 않으니까. 죽게 되더라도 아버지처럼 되어 다자이에게 먹히고 싶지 않았기에. 아리아는 입을 열어 그녀가 겨우 도출해 낸 정답을 혀 위에 올려야만 한다.

“그러면…….”

“그러면?”

“내게 맹세해줘.”

다자이의 미소가 서서히 지워진다. 동시에 아리아의 입술 끄트머리가 위로 올라간다. 다자이는 아리아의 손에 의해 구겨진 와이셔츠를 내려보다가 다시 여자에게 시선을 둔다. 그녀는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진짜 광증에 걸린 인간처럼 눈물을 질질 흘려대며 웃고 있었다. 인간은 참으로 유약하구나. 아니, 아리아가 유약한 걸까. 다자이는 투명한 하늘색을 유심히 바라보며 생각한다. 아, 불쌍한 아리아. 어쩌다가 내 눈에 띄어선. 다자이는 그가 입고 있는 옷에 닿은 여자의 손을 잡는다. 그리고 아주 정중히 떼어둔다. 그러면 아리아는 마치 죽음이 앞에 닥친 사람처럼 희게 질린다. 그 모습이 퍽 같잖고, 애처롭게 보여서 상식적으로는 그래선 안 된다는 걸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유쾌하고 즐거웠다. 다자이는 습관적으로 죽음을 염원했고 그럴 때면 버릇처럼 살아갈 이유를 고민해보곤 했다. 그러면 생각나는 게 아리아였다. 난 어쩌면 널 망치려고 태어난 걸지도 모르겠어. 뱉어내지 못할 말을 속으로 삼킨다. 하지만 다자이는 발설의 욕구를 참아내는 것과 별개로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릴리아나가 목을 맨 그 나무에 따라 목을 매려던 자신을 바라보던 소녀가 엉엉 울 때부터. 저 여자아이를 울리고, 망치고 싶다고 문득 생각했을 때부터. 아리아의 머리카락을 빗겨주던 릴리아나가 보기 싫어졌을 무렵부터. 생애 처음으로 품게 된 감정과 욕망의 시작점을 이해할 수 없었을 때, 다자이는 아리아를 연민했다.

“그래. 맹세할게.”

“정말로?”

“응. 우리의 아버지인 하나님께도. 그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네게 맹세하지.”

“하하…….”

한숨 같은 웃음을 내뱉는 아리아는 그제야 울음을 터트렸다. 손바닥으로 눈물을 닦아내다가, 손등으로 눈가를 비벼댄다. 아버지. 아버지이. 흐느끼며 죽어버린 아비를 몇 번이나 불러댄다. 아리아는 그가 돌아오지 않을 것이고, 몰랐다 한들 인간으로서 저지르면 안 된 죄악을 저지른 주제에 부끄러움도 모르고 아비를 불러대고 있다. 다자이는 그녀에게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인다. 여기엔 이제 너랑 나밖에 없어. 마부도 이 저택을 떠났거든. 넌 나밖에 남지 않았어. 아리아. 모두가 널 미쳤다고 생각해. 내가 없어지면 너는 광증에 걸린 환자가 되어서 불에 타 죽거나 목이 베이겠지. 광증 환자가 맞이할 결말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렇기에 아리아는 다자이의 말이 한없이 두려울 뿐이었다. 그녀는 불에 타는 자신을 상상한다. 기요틴에 목이 잘려 바닥을 나뒹구는 머리를 떠올린다. 그는 낯이 창백해진 여자를 품에 안는다. 괜찮아. 아리아. 우리는 아주 사이가 좋은 친구지 않나. 아리아는 마치 구세주를 만난 것처럼 다자이의 등에 손을 얹는다.

어딘가 잘못되었다는 자각은 있다. 많은 게 어긋나있고, 잘못되었으며, 풀어낼 수 없을 정도로 꼬여있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알 수가 없어서. 아리아는 결국에 생각하기를 관둔다. 그녀는 무언가를 사고하고 추론하는 대신에 다자이의 품에 몸을 기댔다. 나, 죽이지 마. 아리아의 시선은 식기 안에 든 고기 스튜에 닿아있다. 다자이는 그 말에 안 죽인다니까, 하고 대답하며 몸을 일으킨다. 아리아도 그를 따라 일어설 수밖에 없었다.

“오랜만에 정원에 가자. 가벼운 산책은 삶에 활력을 주곤 하니 지금의 네게 도움이 될 거야.”

다자이는 정원을 향해 걷는다. 그리고 정문의 문턱 앞에 멈춰 선 아리아를 돌아본다. 그녀는 저택 안과 밖을 가르는 경계선 앞에 서서 그 선을 내려보고 있다. 뭐해? 다자이가 묻자 아리아는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저택 밖에 내려앉아 있는 빛이 그녀의 얼굴에 묻어난다. 나가도 돼? 아리아는 아주 사소한 것을 물었다. 그는 태연한 얼굴로 괜히 정원을 한 번 둘러보다가 고개를 끄덕인다.

“내가 있으니 괜찮아.”

“네가 없을 때는?”

“글쎄. 그건 네가 하는 것에 따라 다르지 않을까.”

남자의 손을 잡는다. 다자이는 그 무엇도 어렵지 않다는 듯이 아리아를 밖으로 이끈다. 정원사를 포함한 사용인 모두가 휴가를 떠났지만, 정원은 그들이 관리하던 모습 그대로였다. 그간 정원사 대신 다자이가 관리한 걸까? 그녀는 시들지 못한 프리지아 꽃밭을 걷는다. 천이 미처 가리지 못한 발목을 잔디와 꽃잎이 간질인다. 불어오는 바람이 이전과 달리 조금 차다. 숨을 내뱉을 때면 입김이 나올 것만 같다. 다자이는 그가 입고 있던 재킷을 벗어 아리아의 몸에 둘러준다. 옷을 새로 맞추는 게 좋겠어. 홉킨스 부인의 샬롱을 주로 이용했었지? 근시일 내로 홉킨스 부인을 부르도록 할게. 벨벳으로 만든 드레스를 몇 벌 맞추도록 해. 너희 저택이 있는 곳은 겨울이 온화했을지 모르겠지만, 이곳의 겨울은 꽤 혹독한 편이거든. 아리아는 그렇구나, 하고 대답한다. 그녀가 신고 있는 구두에 의해 짓밟히고 형태를 잃는 연약한 식물을 내려본다.

“……집으로 하루만 돌아가고 싶어.”

“왜 하루만 돌아가고 싶은 거야?”

“옛날로 돌아간 느낌이 들 것 같아서.”

“돌아가고 싶어?”

아리아는 하늘을 올려본다. 돌아가고 싶은 거 같아. 어느 때로 돌아가고 싶은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양아버지가 살아있을 무렵으로? 폴이 나뭇가지를 잘라내던 그때로? 아니면 릴리아나가 머리를 빗겨주던 당시? 그것도 아니라면, 다자이를 만나기 전? 모든 때가 그리웠고 상상만으로 향수를 불러왔기에 아리아는 언제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하기 힘들었다. 그녀는 다시 말한다. 돌아가고 싶어. 명확한 때를 말하지 못하는 아리아를 보며 다자이는 그저 웃었다. 그는 명확한 판단조차 내리지 못하는 아리아의 모습을 즐기는 듯했다. 어쩌면 이미 즐거움에 몸을 맡겼을지도 모른다. 미소를 입에 머금은 채, 여자를 바라보던 남자는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는다.

“아리아. 여기엔 네가 좋아하는 프리지아가 있어. 너희 저택의 프리지아는 다 시들었지만, 이 정원의 프리지아는 언제나 만개해 있을 거야. 원한다면 유리온실을 만들어줄게. 그러니 과거를 그리워하지 마.”

어차피 돌아가지도 못하잖아. 다자이가 덧붙인 말에 아리아는 조금도 부정하지 않고서 고개를 끄덕인다. 둘은 다시 발을 앞으로 내디딘다. 아리아는 빼곡하게 심어진 프리지아를 본다. 가지치기가 잘 되어있지 않아 비뚤비뚤 자라난 나뭇가지를 본다. 그리고 다자이의 뒷모습을 눈에 담는다. 불어오는 바람에 짙은 갈색의 머리카락이 허공에 나풀댄다. 아리아의 입술이 서서히 벌어진다.

“다자이.”

“왜, 아리아.”

“궁금한 게 있어.”

“뭔데~?”

“……나한테 왜 그랬어?”

아리아의 말에 다자이가 멈춰 선다. 그녀는 넓지도 좁지도 않은 방에 갇혔을 무렵부터 생겨난 의문을 도저히 지워낼 수가 없었다. 다자이는 왜 나한테 이런 걸까. 망치고 싶어서? 엉망으로 만들고 싶어서? 내가 싫어서? 아리아는 의문에 시달리는 게 이제는 지긋지긋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다자이는 아리아의 말에 고개를 옆으로 기울인다. 잡고 있던 그녀의 손을 놓고서 주위를 느리게 걸어 다닌다. 이따금 사람들은 그리 중요하지도 않은 걸 중요하게 여기곤 하던데…… 너도 그런 거겠지. 다자이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지금의 상황이지 그게 만들어진 이유와 과정은 중요치 않다. 하지만 모두가 그처럼 구는 것은 아니었고, 제 소꿉친구는 과정과 이유와 같은 것들을 퍽 중요시하곤 했기에 그는 답지 않은 친절을 베풀기로 한다.

“타인을 이해하는 것에 뭐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내가 먼저 물어봤잖아.”

“네 질문에 대답하기 위한 말이야.”

“……이해하는 데 뭐가 필요하냐고?”

“응.”

그녀는 타인을 이해해보려고 한 적이 없다. 왜냐하면, 주위에 있는 사용인들과 가족이 먼저 그녀를 이해해주곤 했으니까. 부모에겐 수도원의 고아원에서 자란 불쌍한 양딸로서 존재했고, 사용인들에겐 그들보다 더 높은 직위에 있는 사람이었기에. 아리아는 누군가를 진심으로 이해해보려고 한 적이 없을 것이다. 아리아는 인정하려고 하지 않겠지만, 그녀는 안정적인 환경에서 평온하기 짝이 없게 자라왔으니까. 누군가를 진심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상황 자체가 벌어지지 않았을 테니까. 다자이는 그걸 알기에 아리아가 도출해 낼 생각에 기대하지 않는다.

“그냥, 그 사람의 상황을 생각해보고…….”

“그건 동정이지. 이해하는 건 아니지 않나.”

“난 매번 그랬는걸.”

“하하. 그럴 수 있지. 나를 예로 들자면…… 난 타인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려면 동등해야 한다고 믿어.”

“동등함?”

“같은 경험을 해보는 것만으로 그 사람의 단편적인 상황과 생각이나 감정의 일부라도 이해할 수 있고 예상할 수 있게 되거든.”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다자이의 시선이 아리아의 얇은 입술에 닿는다. 이렇게 말해줬는데도 모르겠어? 그렇게까지 멍청해진 거야? 아리아는 그제야 남자의 말을 속으로 곱씹는다. 한참을 말없이 서 있던 여자는 미간을 좁힌다.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망막에 물막이 맺힌다. 그녀는 손가락을 안으로 말아쥔다. 다자이를 때리거나 해칠 수도 없는 주제에 손에 힘을 준다. 널 만나면 안 됐는데. 행동과 달리 목소리는 금방 흩어질 것처럼 아주 작았다. 아리아는 많은 것을 후회한다. 하나하나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걸 후회할 수밖에 없었다. 떨리는 목소리로 띄엄띄엄 말을 이어가는 여자를 내려본다. 남자는 상체를 살짝 굽혀 그녀와 눈을 맞춘다.

“꼭 그때가 아니었더라도 너랑 나는 언젠가 만났을 거야. 그리고 이렇게 됐겠지.”

“왜 나야?”

“그러게. 왜 너였을까. 그건 나도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어.”

다자이는 시선을 돌린다. 만개한 프리지아를 손으로 가리킨다. 여긴 네 생각처럼 마냥 나쁜 곳은 아니야. 네가 좋아하는 프리지아가 잔뜩 피어있잖아. 원한다면 강아지도 키우게 해줄게. 맥스처럼 작고 황금색 털을 가진 강아지를 가져올게. 겨울이 되면 유리온실을 들일 거야. 그곳에는 프리지아와 장미를 잔뜩 심어둘 거야. 꼭 그게 아니더라도 좋아. 다른 꽃을 잔뜩 심어둘게. 상상해 봐. 밖에선 눈이 내리는데 너와 내가 있는 유리온실은 따뜻하고 꽃이 피어있을걸? 어때. 아름답지? 아리아는 다자이의 손끝이 가리키는 곳에 시선을 둔다. 거기에는 커다란 나무가 있었다. 릴리아나가 목을 매고 죽은 것과 비슷하게 생긴 나무를 보며 아리아는 헛웃음을 터트린다.

“난 죽이지 마. 다자이.”

힘없이 뱉어낸 말에 다자이는 웃음기가 서린 목소리로 대답한다. 안 죽인다니까. 네게 맹세했잖아. 나는 네가 광증에 걸려 제대로 된 말을 내뱉지 못하게 되더라도 죽이지 않을 거야. 우리는 서로를 대체할 수 없는 아주 소중하며 오래된 친구니까. 그러곤 아래로 툭 떨어진 손을 잡는다. 손가락 사이에 손가락을 끼워 넣자 손바닥이 맞닿는다. 미적지근한 체온을 느끼며 아리아는 느리게 눈을 감았다. 제발 나는 먹지 말아 줘. 이기적이기 짝이 없는 말을 겨우 씹어 삼킨다. 위액에 녹아내리는 문장의 파편이 무르되 질긴 내장을 찔러댄다. 그녀는 잠시 고민하다가 남자의 손을 맞잡는다. 이제 아리아에게 남은 건 다자이밖에 없었으니까. 릴리아나도, 맥스도, 폴도, 그리고 아버지도 죽어버린 지금. 남은 것이라곤 오로지 다자이뿐이라서.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남자의 손을 잡았다. 아리아는 꾹 닫고 있던 입술을 벌린다.

“네가 바란 게 이거야?”

아리아의 물음에 다자이는 처음으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아리아가 바라보고 있는 나무를 보며 윗입술로 아랫입술을 내리누른다. 그녀는 그에게 대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나무를 바라보며 릴리아나를 생각한다. 그러다가 문득 다자이가 신을 믿지 않아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자이가 신을 믿었더라면 죽은 뒤에 지옥에 떨어질 텐데. 애초에 다자이가 죽기나 할까. 초점 없는 눈동자 안에 나무가 맺힌다. 굵은 나뭇가지에 누군가 목을 매단 거 같다. 미간을 좁히며 그게 누구인지 보려고 노력한다. 거기에는…… 그 나무에는…… 목을 맨 여자가 있다.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흰 머리카락이 나풀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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