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물림
휘트니 x 바닐라
바닐라는 누군가에게 폭력을 행한 뒤에도 기도하지 않는다. 여타 통상적이고 일반적인 종교인과는 사뭇 다른 점이 휘트니는 퍽 마음에 들지 않았다. 독특하다거나 혹은 타인과 다르다거나 아니면 그것조차 바닐라답다고 할 수 있지만, 그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에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단순한 생각과 감정으로 정의 내린 걸지도 모른다. 휘트니는 입에 꼬나문 담배의 필터를 이로 짓씹는다. 탁한 연기가 뺨이나 이마를 훑으며 높은 하늘로 넘실넘실 올라가다가 사라진다. 빌어먹을 새끼. 휘트니는 바닐라를 생각할 때면 낯설지 않고 오히려 익숙한 욕설을 내뱉곤 했다. 그것은 일종의 습관이었고, 해소되지 않을 것 같은 답답함을 표출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기도 했다. 필터 끄트머리까지 다 타버린 담배를 바닥에 내던지듯 버리고선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는다. 손가락 끄트머리에 걸리는 담뱃갑이 거슬렸다. 손에 힘을 줘 구기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였으나 형편이 그리 넉넉하지 않은 휘트니로선 그것을 참아낼 수밖에 없었다.
“야. 휘트니.”
저기 걔 지나간다. 걔. 휘트니와 함께 어울리는 양아치는 검지로 바닐라를 가리킨다. 바닐라는 품에 휘트니나 그의 친구들이 절대 즐겨보지 않을 거 같은 책을 한 아름 안고 있었다. 그의 손등이 조금 붉다. 휘트니는 그 흔적이 왜 생겼는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쟤한테 안 가? 시시덕대는 남자를 바라보며 미간을 찡그린다. 씨발. 내가 왜 쟤한테 가야 하는데. 어? 짜증스레 대꾸하는 휘트니에 남자의 낯에 묻어나던 웃음이 지워진다. 뒤늦게나마 말을 얼버무리는 모습은 어딘가 안쓰럽기까지 하다. 그러나 휘트니는 그걸 신경 쓰지도, 개의치도 않았다. 그의 모든 신경과 그것을 담아낸 시선은 바닐라에게 닿아있다. 바람이 불어올 때면 나풀대는 탁한 회색 머리카락. 대비되게 흰 피부. 빛을 받을 때면 미약하게 반짝이는 색 옅은 눈동자. 추상적으로나마 존재하는 천사의 존재를 실제로 빚어내면 바닐라의 색을 띠고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휘트니는 불쾌한 것이다. 불쾌했고, 불편하고, 망가트리고 싶고…… 저열하고 추잡한 욕망을 늘어두면 끝이 없었으며 그 끝없는 욕망은 휘트니의 폭력성을 자극한다. 오븐 속에서 부풀어가는 빵처럼 끝없이 크기를 키워나갈 것처럼 굴던 욕망은 곧 형태를 잃어간다. 동시에 휘트니는 손가락을 안으로 말아 쥐었다. 꺼질 것 같지 않은 욕망은 어떠한 기억을 떠올릴 때면 쉬이 사라지곤 했다. 올라가는 작은 손. 그 손에 들린 볼트나 너트를 돌릴 때 사용하는 스패너. 숨을 크게 들이쉴 때면 살짝 부푸는 가슴. 시선을 천천히 위로 올리면 보이는 꾹 다문 입술과 살짝 상기된 뺨.
“씨발. 진짜.”
휘트니가 낮은 목소리로 욕설을 읊조리자 주변에 있는 양아치들은 그의 눈치를 살폈다. 넉살 좋은 몇은 휘트니에게 아부하듯 살갑게 말을 걸기도 했다. 한 명이 어깨에 손을 얹었을 때, 휘트니는 바닐라를 향한 복합적인 감정을 타인에게 풀 수밖에 없었다. 힘을 줘 손을 쳐내고 발로 복부를 걷어찬다. 바닥으로 고꾸라진 소년의 눈동자에는 익숙한 공포와 불안이 맺혀있다. 보통은 이래야 하는데. 휘트니는 눈동자를 옆으로 굴린다. 바닐라의 뒷모습을 힐끗 바라보다가 눈을 느리게 감았다가 뜬다. 왜 쟤는 안 저럴까. 대체 왜? 휘트니는 이유를 알고 있다. 그런데도 계속해서 생각하는 건, 계속해서 곱씹는 이유는 어쩌면 부정하고 싶은 걸지도 모른다. 저 작은 꼬맹이한테. 한참은 작아서 내려봐야 하는 꼬맹이에게 내가 얕보이고 있다고? 문득 떠오른 생각에 휘트니는 찢어진 입술을 이로 다시 씹어댈 수밖에 없었다. 날카로운 것 같으면서도 둔탁한 통증이 얇은 피부 위에 내려앉는다. 그는 말버릇과 같은 욕설을 내뱉고서 등을 돌려 구석진 골목 밖으로 걸어 나간다. 야. 야. 휘트니, 휘트니! 뒤에서 들려오는 말을 의도적으로 무시한다. 걸음이 점차 빨라진다. 저 새끼를 만나고, 다 이상해졌어.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그의 인생은 빈말로라도 좋다고 칭할 수 없는 것이다. 번듯하지 못했고, 책잡힐 만한 일을 저지르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잘못된 모든 것이 바닐라의 탓이라는 건 아니다. 그가 잘못되었다고, 엉망이라고, 이상해졌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닐라라는 사람을 의미도 없이 어영부영 흘러가는 시간의 일부에 집어넣기 시작했을 때부터다.
“빌어먹을 새끼.”
바닐라에 대해 말하려고 하거나, 생각할 때면 욕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 뒤에는 아주 당연한 과정인 것처럼 담배를 태우고 싶었고, 그 쓴맛을 곱씹으며 짝다리를 짚는다. 휘트니의 뺨에 엉겨 붙은 피딱지나 상처, 입술을 씹을 때면 피어오르는 통증. 그는 결국 손을 위로 올려 결이 그리 좋지는 않은 금색 머리카락을 헝클어트린다. 뻣뻣한 머리카락이 얽히고설키며 손가락에 걸린다. 죽 늘어지는 머리카락에 휘트니의 미간이 좁아진다. 아, 진짜. 뭔 오늘따라 이렇게 되는 게 없지. 바닐라를 봤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짜증이 치밀어올랐다. 휘트니는 바닐라라는 존재에 대한 짜증인 건지, 생전 처음 겪어보는 굴욕감에서 비롯된 감정인 건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그리 어렵게 꼬아서 생각하는 것을 즐기지 않는 휘트니로서는 그 모든 게 마음에 들지 않을 수밖에 없다. 손가락을 안으로 말아쥘 때면 피부가 찢어져 맨살에 손톱이 닿는 것이 한없이 짜증이 났다. 그에게 폭력이란 가장 편한 수단에 가까웠으며, 통증이란 그 자신이 타인에게 안겨주는 것이었으니까. 낯설었다. 불쾌하다. 당장의 기분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가 그것밖에 없다. 편리하던 수단을 당하게 되고, 통증이 가장 친밀한 친우처럼 달라붙었다니. 자존심이 상했다. 저 망할 년을 망가트리든, 죽이든, 망치든 뭐라도 해야만 기분이 풀릴 것 같았다.
휘트니의 시선은 바닐라가 지나간 길에 닿아있다. 수많은 사람이 지나다닌 길에 무슨 흔적이 남을 리가 없겠지만, 그 안에서도 바닐라의 무언가를 찾고자 하는 것처럼 눈을 떼지 않는다. 그게 마치 꼭 바닐라의 약점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것처럼. 그렇게 해야만 바닐라를 망칠 수 있다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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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닐라란 사람은 이름만 들었을 때, 부드럽고 상냥할 것만 같다는 생각이 막연하게 들곤 했다. 유순하게 웃을 것 같고, 사람을 유하게 대할 것 같으며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쉬이 손을 뻗을 것만 같다. 그것은 휘트니에게 있어 약하다는 것을 뜻했다. 씨발, 내가 알았으면 그랬겠어? 아니. 알았어도, 그랬겠지. 바닐라를 굴복시키고 싶고, 망가트리고 싶다는 그 욕망 하나로 똑같이 굴었을 것이다. 휘트니는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그것을 알기에 휘트니는 지금 바닐라가 주로 들고 오는 몽키스패너를 손에 쥐고 있다. 서늘한 금속의 감각이 손바닥에 송골송골 맺힌 식은땀에 가려져 사라졌을 때, 휘트니는 그제야 아래로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앞에는 바닐라의 집이 있다. 바닐라의 집은 딱 바닐라를 건축물로 만들어낸 것만 같았다. 조촐한 거 같으면서도 없어 보이진 않고, 단순한 거 같으면서 그렇기에 이질감이 느껴지는 딱 그런 곳에서 바닐라가 살고 있다. 휘트니는 스패너를 들고 있지 않은 손을 위로 올린다. 그리고 단단한 나무로 만들어진 현관문을 가볍게 두 번 두드린다.
“야. 너 안에 있지.”
이름도, 친근한 애칭도 부르지 않는다. 바닐라의 애칭이나 이름을 부를 정도로 둘은 가깝지도 않았고, 그럴 사이도 아니었으며 휘트니가 바닐라에게 애틋한 감정을 품고 있지도 않았으니 이상하지 않았다. 손에 서서히 힘이 들어간다. 너 안에 있잖아. 무시까지 말고. 거친 어투와 끄트머리가 갈라진 목소리는 지금 휘트니의 기분을 직접적으로 알리는 매개체가 되고 있다. 그의 시선이 현관문의 손잡이에 닿을 때쯤 그의 신발 위에 미약한 빛이 내려앉는다. 휘트니는 그 빛에 저도 모르게 스패너를 든 손을 등 뒤로 숨겼다.
“밤에 이러는 거, 민폐인 거 알기나 해?”
“네가 민폐라는 건 알고?”
“민폐에 가까운 행동을 모르는 건 내가 아니라 너겠지. 휘트니.”
“넌 존재 자체가 민폐야.”
“갑자기 또 왜 이래. 약에도 손대기 시작했어?”
드디어, 기어코 그거까지 손대는 거야? 바닐라는 한심하다는 감정을 숨기지도 않았다. 팔짱을 낀 채로 휘트니를 올려보는 바닐라의 눈동자가 반짝인다. 그걸 보고 휘트니는 문득 생각했다. 저 안구를 파내고 싶다고. 폭력성과 가학성의 그 어딘가에 있는 그의 욕망은 추잡하고 더러웠다. 특히나 자신보다 작고 연약해 보이는 것에 욕망은 비대해지곤 했다. 바닐라는 휘트니의 욕망을 자극하기에 딱 적당한 존재다. 그럴 때면 휘트니는 대물림과 같은 폭력과 그것에 잇따라 오던 통증을 곱씹곤 했다.
“그딴 거 안 하는데?”
“네 친구인 제이크는 하더라.”
“하, 그건 병신이라 그런 거고. 난 다르지.”
“네가 뭐가 달라. 내 눈에는 제이크나 너나 똑같아.”
“말 다 했어?”
“덜했는데.”
“더 해봐. 그러면.”
“싫어. 입 아파. 귀찮기도 하고.”
눈동자를 옆으로 굴리던 바닐라는 휘트니의 정강이를 툭툭 찬다. 할 말 없으면 가. 나 잘 거야. 크게 신경 쓰일 정도로 아프진 않았다. 아직 다 사라지지 못한 멍이 눌릴 때면 욱신거리긴 했으나 참기 힘들진 않았다. 휘트니가 가장 참기 힘들었던 것은 자존심이 구겨지는 거였다. 나보다 한참은 작은 꼬맹이한테. 계집애보다 더 계집 같은 사내새끼한테. 감정 앞에 이유가 길게 이어 붙기 시작한다. 손에 힘을 준다. 바닐라는 아는지 모르는지 연신 툭툭 건드리다가 곧 얕은 한숨을 내뱉는다. 오늘 일이 많아서 피곤하니까. 돌아가. 귀찮게, 진짜. 투덜거리며 등을 돌리는 바닐라를 눈에 담는다.
“야.”
휘트니는 바닐라를 부른다. 등 뒤에 두었던 손을 아래로 툭 떨군다. 바닐라가 천천히 몸을 돌리고 입을 벌리려고 할 때, 그는 손에 든 스패너로 바닐라의 둥근 머리를 강하게 내리찍었다. 가쁜 숨을 겨우 내뱉는다. 공기를 들이쉴 때면 뜨뜻미지근한 게 폐부 깊숙한 곳을 훑고 빠져나갔다. 바닐라의 눈동자가 뒤집어진다. 흰자가 드러나고 그의 몸이 서서히 아래로 기운다. 아, 씨발. 휘트, 니. 너……. 띄엄띄엄 내뱉는 말의 발음은 갈수록 어눌해진다. 바닐라는 입도 다물지 못한 채로 바닥에 쓰러졌다. 휘트니는 그를 내려보다가 발로 몸을 툭툭 차며 입을 떼어낸다.
“뒤졌냐?”
야. 너, 진짜 뒤졌냐고. 휘트니의 목소리에 기대감이 묻어난다. 그는 바닐라의 머리맡에 선다. 찢어진 피부 틈새로 흘러나오는 붉은 피가 휘트니의 신발 바닥을 적신다. 입술의 끄트머리가 위로 올라간다. 하하, 하하하!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에서 힘이 거의 다 빠진 웃음이 새어 나온다. 그는 바닐라의 집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완전히 안에 들어온 뒤, 열려있던 문을 닫는다. 휘트니는 바닐라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막연하게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무슨 일을 저질러도 짜증스레 한숨을 내뱉고서 휘트니가 저지른 폭력을 그대로 답습하여 보여주는 무언가로 존재했기에 그는 작금의 상황을 완벽하게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즐거웠다. 유쾌하고, 흥분되었다. 동시에 불안하다. 완전히 믿기지 않아 몇 번이나 확인하고 싶었고, 혹여나 확인하기 위해 바닐라와 가까워지면 그의 작은 손이 제 머리카락을 억세게 감싸 잡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휘트니는 감히 몸을 굽히지 못했다.
“죽었냐고. 진짜로, 정말로.”
스패너가 바닐라의 옆으로 떨어진다. 둔탁한 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그는 그걸 아주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큰 소리가 나든, 나무로 만들어진 바닥에 흠집이 생기든 휘트니에게 있어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바닐라로 인해 만들어진 굴욕감을 해소하고 켜켜이 쌓인 욕망을 배출하는 것이었다. 몇 번을 말해도 바닐라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휘트니는 그제야 바닐라에게로 손을 뻗었다. 그의 손은 바닐라의 머리카락에 닿는다. 탁한 잿빛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 피부에 닿을 때면 간질였고, 그 간질임이 거슬렸다. 손가락을 안으로 말아쥐자 뻣뻣한 머리카락이 완전히 피부에 닿는다. 휘트니는 그제야 한쪽 입술 끄트머리를 위로 올려 웃을 수 있었다. 며칠 전, 삼촌이 틀어둔 라디오의 한 방송에서 신청곡이랍시고 틀어준 팝송의 음을 흥얼거린다. 가사가 뭐였더라. 기억이 안 나네. 그는 바닐라를 만나기 전의 그 여유로운 모습을 되찾은 것처럼 굴었다. 바지 주머니에 꽂아 넣은 손이 잘게 떨린다. 휘트니는 입안의 여린 살을 이로 짓씹다가 결국 가장 단순하고 빠른 방법을 택한다.
“무슨 불구처럼 굴어. 휘트니. 씨발. 정신 좀 차리자. 어? 정신 차리자고.”
바닐라, 저 새끼는 지금 머리채가 잡힌 채로 질질 끌려도 눈 하나 뜨지 못하는 상태인데. 그러니까 두려워할 건 그 아무것도 없는데. 두려움을 느낄 이유도 없는데. 왜 나는 바닐라가 만들어낸 폭력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거지? 휘트니는 바닐라를 질질 끌고 그의 거실에 들어섰다. 머리채를 놓자 억센 손길과 강한 힘에 끊기고 뽑힌 몇 개의 머리카락이 손가락에 엉켜있었다. 머리카락을 떼어내기 위해 손을 몇 번이나 털어낸다. 그러며 휘트니는 고민했다. 저걸 어떻게 해야 나와 같은 감정을 느끼게 할 수 있을까. 강간을 해야 할까. 사창가에 팔아치우는 게 좋을까. 저 새끼가 타인이 가한 폭력에 망가지기나 할까. 아니. 이렇게 생각하는 건, 나답지 않다. 휘트니는 바닐라가 없앤 과거의 자신을 떠올린다. 그것을 모방하기 위해서였다. 부산스럽게 발을 옮겨대며 생각에 잠겨있던 중, 아래에서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한 신음이 들려왔다.
“휘트니이…….”
바닐라는 눈을 반쯤 뜨고서 손으로 휘트니의 발목을 감싸 쥔다. 이, 빌어먹을 새끼야아. 바닐라의 목소리는 평소보다도 작았다. 어눌한 말투는 바닐라가 꼭 그 자신보다 못한 사람이 된 것만 같아서 듣기 좋았다. 휘트니는 아주 가볍게 바닐라의 손을 떼낸다. 발을 움직이며 바닐라의 상처에 그의 신발 굽이 닿은 것은 분명히 실수가 아니었다. 야. 미안. 미안. 실수였어. 그는 폭력을 당해보기 이전의 자신처럼 여유로이 말한다. 아무렇지 않다는 듯 구는 모습에 바닐라는 헛웃음을 터트린다.
“실수는 개뿔.”
“정말 실수였다니까.”
“네가?”
어깨를 으쓱이는 휘트니에 바닐라는 결국 미간을 좁혔다. 내가 널 아는데 뭐가 실수야. 짜증스레 내뱉은 말에 휘트니는 소리내어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너 지금 표정 굉장히 모자란 새끼 같아. 멍청해 보여. 불쌍하기도 해라.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내뱉으며 바닐라의 손등을 잘근잘근 밟는다. 사과하면 봐줄 수도 있어. 휘트니의 말에 바닐라는 헛웃음을 터트린다. 누가 누굴 봐준다고 하는 건지. 치마를 들췄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머리가 깨지고 입술이 찢어진 건 휘트니였다. 바닐라는 그보다는 멀쩡한 모습으로 코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소맷자락으로 벅벅 닦아내며 집으로 걸어왔었다. 그때, 네가 나보다 훨씬 엉망이었잖아. 병신아. 기억하지? 너 기억하고 있잖아. 웃음기가 뒤섞인 목소리에 휘트니는 입가에 머금고 있던 미소를 서서히 지워냈다.
“기억하고 있으니까 이렇게 지랄하는 거겠지.”
“야. 좋은 말로 할 때, 닥쳐.”
“너 머리 안 좋지. 이미 좋은 말을 하지도 않았는데, 뭘 좋은 말로 할 때 닥치래.”
바닐라는 앓는 소리를 내며 겨우 몸을 일으켰다. 비틀거리는 모습이 그가 아직 미처 다 회복하지 못한 것을 알려주는 듯했다. 그는 얼굴에 잔뜩 묻어난 피도 닦아내지 않은 채로 휘트니를 올려본다. 빛을 받을 때면 언제나 반짝이던 눈동자는 탁하기만 하다. 바닐라는 비틀거리다가 작고 낡은 소파에 손을 얹는다. 그러더니 곧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뱉는다. 그는 고개를 뒤로 젖힌 채로 숨을 겨우 내뱉는다. 휘트니는 바닐라의 행동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바닐라는 그가 지금 신고 있는 가죽 단화를 내려보다가 서서히 발을 올린다. 피할까. 아니면 그냥 맞을까. 피하자니 겉멋이 살지 않았고, 맞자니 내키지 않았다. 짧은 고민을 이어가고 있을 때, 휘트니의 정강이에 바닐라의 발이 닿았다. 그는 저도 모르게 입술이 벌어질까 이로 얇은 아랫입술을 씹을 수밖에 없었다.
“왜. 니가 당하니까 좆같아?”
“……당연히 좆같은데?”
“근데 왜 당하는 남은 좆같을 거라 생각을 못 할까. 휘트니, 너는.”
“내가 당하는 게 아니니까.”
“지금 당하고 있잖아. 매일. 엉망진창으로. 네 자존심이 완전히 구겨질 정도로 당하고 있는데도 이해를 못 해?”
“그러니까 이러는 거지. 병신아.”
좆같은 얄랑한 자존심 좀 회복해보겠다고. 찢어진 입술 틈새로 뜨뜻미지근한 액체가 송골송골 맺힌다. 뺨을 타고 식은땀이 아래로 흘러내린다. 그 모습을 보고 바닐라는 다시금 헛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긴장이나 좀 감추고 말하든가. 긴장한 건 다 티 내고, 저렇게 말하는 건 뭐야. 오히려 없어 보이는데. 피에 엉겨 붙어 피부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넘긴다. 얕은 숨을 겨우 내뱉는다. 통증과 뜨거운 열기 탓인지 머리가 어지러웠다. 야. 씨발. 휘트니. 너 때문에 오밤중에 이게 뭐야. 빌어먹을 새끼야.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만들어진 욕설에 휘트니는 즐거웠고 동시에 짜증이 났다. 바닐라가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당황하고, 불쾌해하며, 자신과 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생각에 유쾌했다. 그러면서도 멀쩡히 폭력을 행하는 모습이 거슬리기 그지없었다. 휘트니는 정강이에 묻어나는 통증을 애써 묻어내며 걸음을 옮긴다. 부디 그 걸음이 이상하지 않고 어색하지도 않길 바라며 바닐라의 앞에 선다.
“넌 내 대가리 깨도 되고. 난 안 돼?”
“그건 네가 먼저 시비걸지 않았던가.”
“어찌됐든 결과는 비슷하지. 결과만 두고 보자고.”
휘트니의 손이 바닐라의 작은 머리에 얹어진다. 바닐라는 그게 불쾌하다는 듯 힘없이 손을 들어 머리에 얹어진 손을 쳐낸다. 휘트니는 특별히 이번만큼은 바닐라의 뜻에 따라 손을 치워내주었다. 그게 더 그에게 모욕적으로 느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바닐라는 휘트니의 예상대로 아까보다 더 인상을 쓰고 있었다. 조금 벌어진 입술 틈새로 욕을 읊조린 것 같기도 했다. 휘트니는 마치 뒷골목에 있을 것만 같은 양아치처럼 실실 쪼갰다. 치겠다? 능청스레 말을 건네자 바닐라는 대답한다.
“왜. 너 꼭 지금 쳐주길 바라는 거 같다? 한 대 쳐줄까?”
“칠 수 있으면 쳐 봐. 지금 서 있는 것도 힘든 거 같은데. 부축이라도 해줘?”
“너한테 부축받을 바에는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자존심은 있나보네.”
“아니. 그런 게 아니지. 난 그냥, 네게 부축받는 게 싫을 정도로 너랑 엮이기 싫은 거야.”
부축받는다는 것은 타인에게 도움을 구걸하거나 그보다 약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뜻하진 않는다. 바닐라는 그걸 알고 있었고, 휘트니는 그걸 모르기에 둘은 일평생 서로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적어도 바닐라는 그렇게 생각한다. 애초에 바닐라는 휘트니를 이해하려는 마음이 없었고, 그의 이해를 바라지도 않았으며 그것은 휘트니 또한 매한가지였다. 그렇기에 문제는 없다. 애초에 문제라고 할 것도 없는 관계이지 않은가. 그는 눈을 느리게 감았다가 뜬다. 뭐, 내가 너 때문에 엄청나게 상처라도 받았으면 했어? 네가 그렇게까지 멍청했던 거라면 안타까울 뿐이야. 바닐라의 목소리는 평소와 같이 한없이 부드럽다. 굴곡 하나 없으며 어딘가 나긋하기까지 하다. 목소리와 달리 말투는 무던하고 딱딱하기 그지없어서, 휘트니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마음에 들지 않는 것과는 별개로 휘트니는 바닐라를 죽일 생각은 없었다. 저 개 같은 새끼를 어떻게든 망가트리고 싶었을 뿐이지. 죽일 생각은 전혀 없었다.
“아…… 이런, 씨발.”
휘트니의 손은 바닐라의 얇은 목에 닿아있다. 바닐라는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컥컥거리면서도 휘트니의 손등을 그리 길지 않은 손톱으로 긁어대거나 이미 피멍이 들어버린 정강이를 계속 걷어찼다. 그러다가 손을 아래로 툭 떨군다. 눈동자가 뒤집히고 흰자가 드러난다. 흰자는 실핏줄이 터져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근육과 살, 그리고 뼈를 덮고 있는 살가죽 아래에서 느껴지던 맥이 서서히 느려진다. 휘트니는 느려진 맥을 자각했을 때쯤에야 황급히 손을 떼어냈다. 그는 타인을 죽기 직전까지 패거나, 괴롭힌 적은 있어도…… 직접적으로 죽음까지 몰아넣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숨이 가빠진다.
“……너때문이야.”
스패너로 머리를 내리찍어도 죽지 않던 바닐라다. 고작 이런 거로 죽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렇지만 휘트니는 이번에 처음 타인을 죽음의 구렁텅이까지 밀어 넣었다. 죽었든, 죽지 않았든 타인의 죽음을 아주 잠시나마 엿본 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손이 잘게 떨렸다. 본인이 생각해도 꼴사납기 짝이 없는 모양새에 휘트니는 연신 욕을 읊조렸다. 씨발. 이런, 개 같은 년 때문에. 빌어먹을. 젠장. 젠장……! 미간이 좁아진다. 그는 손가락을 안으로 말아쥔 채로 때릴 수도 없는 것을 엉망으로 만들고 싶다는 욕망에 더 나아가 그렇지 못하다는 답답함에 시달려야 했다. 그 모든 것보다 휘트니를 두렵게 만든 것은 그 자신이 바닐라를 죽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거 하나밖에 없었다. 숨이 가빠진다. 그는 결국 그가 가장 되고 싶지 않았던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접착제로 붙여낸 것처럼 떨어지지 않던 발을 겨우 떼어낸다. 뒷걸음질 치다가, 도망치듯 바닐라의 집에서 뛰쳐나온다. 풀벌레가 찌륵찌륵 우는 소리가 들렸다. 휘트니. 내가 이상한 게 아니라, 네가 병신인 거야. 네가 이상한 거라고. 휘트니는 바닐라가 습관처럼 내뱉던 말을 속으로 곱씹는다.
“죽은 새끼가 틀린 거야. 알아? 바닐라.”
휘트니는 처음으로 바닐라의 이름을 입에 담는다. 발음이 걸리는 부분 없이 매끄럽게 잘되지 않는 게, 영 별로였다. 넌 어떻게 이름도 좆같냐. 휘트니는 잘게 떨리는 손으로 담뱃갑을 꺼냈다. 멀쩡한 담배를 바닥에 세 개비 정도 떨어트린 뒤에야 겨우 필터를 이로 씹을 수 있었다. 라이터로 불을 붙인다. 그 작디작은 불을 담배 끄트머리에 가져다 대고 담배를 몇 번이나 빤다. 겨우 붙은 불에서 연기가 피어오른다. 휘트니는 급하게 담배를 피우며 연기를 내뱉었다. 그의 불안을 잠재워줄 수 있는 건 오로지 독한 담배인 것처럼 굴었다. 바닐라가 죽었다. 아니? 죽진 않았나? 말을 정정한다. 바닐라는 어쩌면,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것의 죽음에 휘트니는 웃을 수 없었다. 난 니가 죽으면 그날 아끼던 조니워커를 깔 줄 알았어. 씨발. 막 비싼 건 아닌데. 그래도, 몇 번이나 짜낸 보리로 만든 맥주보단 나으니까. 싸구려 맥주보단 조니워커가 더 낫잖아. 필터를 잘근잘근 씹는다. 그러다가 실수로 입안의 살을 씹었을 때는 크게 소리 내어 욕을 했다. 그러면서도 휘트니는 담배를 태우는 걸 멈추지 않았다. 담뱃재를 땅에 털어내고서 필터 끝까지 타버릴 때면 꽁초를 버렸다. 다시 떨리는 손으로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기를 반복했다. 휘트니는 몸의 떨림이 멎을 때까지 담배를 태우고자 했으나, 안타깝게도 그의 떨림이 멎기 전에 담배가 다 동나고 말았다.
“진짜…… 되는 게 없네.”
담뱃잎 쪼가리가 굴러다니는 갑을 완전히 구겨 바닥에 버려버린다. 휘트니는 자리를 뜨기 전, 마지막으로 바닐라의 집을 눈에 담는다. 붉은색으로 칠해진 지붕은 이름도 낯선 나라에 가더라도 흔히 볼 수 있는 것 중 하나다. 차라리 죽어. 썅년아. 죽어버려. 다 기억하고 있을 바엔 죽어버려. 제발. 그는 신을 믿지 않는다. 신이라는 청렴하고 성스러운 단어와 휘트니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는 지독하게 어울리지 않는 거 같다고 그 자신이 생각할 정도였다. 그런 휘트니가 처음으로 신을 찾았다. 예수 그리스도니.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니. 하느님이니. 성모마리아니. 부처, 시바신. 알라신…….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들어본 기억이 있는 신이란 신은 다 속으로 불러대며 바닐라의 죽음을 기도했다. 휘트니는 알 수 없었다. 바닐라의 완전한 죽음과 그로 인한 존재의 말소를 바라는 건지. 아니면 바닐라가 죽지 않고 살아 돌아와 그에게 가할 폭력과 가학이라 칭해도 이상하지 않을 행위를 걱정하여 죽음을 바라고 있는 건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깊이 생각하고 싶지 않아서, 텁텁한 입술을 혀로 가볍게 훑어내곤 눈을 질끈 감는다.
“……뒤져. 제발.”
말을 끝으로 그는 등을 돌려 앞으로 걸어 나간다.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바닐라의 숨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통증으로 인해 가쁘게 내쉬던 숨. 목이 졸려 제대로 내뱉지 못해 조금씩 내쉬어지던 숨. 바닐라를 살아있도록 하는 그 호흡을 멈춘 건……. 휘트니는 결국 다 찢어진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댈 수밖에 없었다. 폭력적이고, 폭력이 가장 익숙하고 능숙한 수단인 것처럼 사용하던 그도 사람을 죽이려고 한 적은 없었다. 다 너 때문이야. 난, 나는, 그럴 생각 없었다고. 변명과 자기변호에 가까운 생각이 연쇄된다. 휘트니는 삼촌의 집으로 돌아가면서, 돌아가고 나서도, 그리고 잠들기 전까지도 바닐라를 생각했다. 그것은 지독하고 지긋지긋한 악몽과도 같았다. 휘트니에겐 그랬다. 자기 직전까지 바닐라에 대해 생각하고, 떠올린다는 거 자체가 끔찍하기 짝이 없다. 휘트니는 머릿속을 떠다니는 바닐라를 잊기 위해 노력한다. 그의 맥박을 지워내고 싶어 침대 시트에 손바닥을 몇 번이나 닦아낸다. 그러면서도 다시금 떠올리게 되는 것이었다. 피를 흘리며, 창백해진 낯을 가리지도 않고서 바닥에 쓰러진 바닐라를…… 도저히 잊을 수 없었다.
휘트니는 누군가에 의해 강제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의 머리맡에는 바닐라가 서 있다. 붕대는 엉성하게 묶인 탓에 금방이라도 풀릴 것만 같았다. 일어났어? 바닐라는 휘트니를 내려보며 묻는다. 휘트니는 그를 올려보며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는다. 안 뒤졌네? 휘트니는 몸을 겨우 일으키고 바닐라와 시선을 맞춘다.
“뒤진 줄 알았잖아. 안 일어나서.”
부러 강하게 말하며 불안을 드러내지 않는다. 바닐라는 그런 휘트니에 고개를 끄덕인다. 덕분에 안 죽었어. 참, 고맙다? 바닐라는 고갯짓한다. 여기서 말해. 아니면 나갈래. 휘트니는 방을 둘러보다가 침대 밖으로 발을 내디딘다. 차가운 바닥에 피부가 닿자 몸이 움츠러든다. 그는 평소와 다르게 차려입지 않고 겉에 후드집업 하나만 대충 걸친 채로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는다.
“안 씻고 나가게?”
“뭐.”
“더러워.”
“지랄.”
“진짜 더럽다. 너. 학교도 그러고 와?”
“죽고 싶으면 말로 하자.”
“그래야 하는 건 너고.”
“아다인게 자랑은 아니지 않냐?”
“너처럼 문란한 거보단 낫지.”
바닐라는 휘트니에게 한 마디도 지려고 들지 않았다. 휘트니는 그게 익숙했고, 익숙했기에 짜증이 났지만, 좁은 방 안에서 바닐라와 부대끼며 언쟁하는 게 더 싫었기에 문밖으로 나간다. 바닐라는 그 뒤를 따라 걸었다. 바닐라는 아주 평온하게 분노라는 감정을 모르는 사람처럼 태연히 말을 꺼낸다. 어젯밤에 있잖아. 그가 말하는 것은 휘트니가 지워내고 싶은 기억의 조각이다. 그것을 바닐라는 잊을 생각이 없다는 듯 아무렇지 않게 말한다. 그게 휘트니는 오히려 더 두렵게 느껴졌다. 동시에 작고 유약해 보이는 바닐라에게 공포를 품었다는 사실이 자존심이 상해 견딜 수 없었다.
“어젯밤에, 뭐.”
그래서 휘트니는 바닐라처럼 아무렇지 않게 어제를 입에 담았다. 그러면 바닐라가 자신의 공포와 불안을 눈치채지 못할 것 같았다. 그의 기대와 달리 바닐라는 작게 소리 내어 웃는다. 바닐라라는 사람이 저렇게 웃을 수 있다는 걸 휘트니는 그걸 보고 처음 알았다.
“너가 내 머리 깼을 때 말하고 있는 거야.”
“아는데?”
“아무렇지도 않아?”
“뭐. 네 발밑에서 빌기라도 할 줄 알았어?”
“아니. 안 그랬으면 했어.”
휘트니와 바닐라는 근처에 있는 인적 드문 공터로 왔다. 그곳은 비행 청소년들의 아지트와 같은 곳으로 술병이나 작은 대마초 잎 조각이 널브러져 있다. 휘트니 또한 이곳에서 몇 번 신세를 진 적이 있었기에 그리 낯설지 않은 장소였다.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는다. 그는 습관처럼 담배를 입에 물고선 라이터의 부싯돌을 손톱으로 긁어댔다. 난 뒤질뻔했는데 네가 갑자기 하느님의 영향이든 예수와 떡을 친 영향이든 회개해서 나한테 빌면 너무 기분이 나쁠 거 같은 거야. 바닐라 또한 휘트니처럼 펑퍼짐한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는다. 휘트니는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굴었지만, 시선만큼은 주머니 들어간 바닐라의 손에 두고 있다. 할 말이 뭔데. 있으면 빨리 좀 해. 질질 늘이지 말고. 그렇게 시간 많아? 시간 많으면 너 노리는 남자애들한테 대주러 가던가. 어떻게든 바닐라의 여유로움을 어그러트리고 싶어 실실 쪼개며 음담패설을 뱉어낸다.
“그러면 네가 좀 더 나은 사람이라도 되는 거 같아?”
바닐라의 말에 휘트니의 윗입술이 아랫입술에 닿는다. 전혀 그런 게 아니라고 완곡하게 부정하고 싶었으나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마치 휘트니조차 알지 못했던 무의식적인 생각이 완전히 해부당해 밖으로 드러난 듯했다. 그는 살면서 처음으로 수치스러움을 느꼈다. 휘트니에 의해 원치 않았음에도 강제적으로 다리를 벌리던 계집년들이나 피할 수 없는 폭력으로 얼굴을 팔로 가린 채로 울던 사내새끼들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휘트니는 본인이 깔보고 무시하며 착취하던 그 약자가 느낄 감정을 느끼고 조금이라도 공감하게 됐다는 게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수치스러웠다. 수치스럽고, 짜증이 나고, 불쾌해서, 그 모든 감정은 결국 바닐라를 향한다.
“화났어?”
“널 주먹으로 패버리고 싶다고 생각한 거뿐이야.”
“그게 화났다고 하는 거야. 모자르고 불쌍한 휘트니. 그것도 모르는구나.”
휘트니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바닐라에게 다가간다. 바닐라는 뒷짐을 진 채로 휘트니를 올려보고 있다. 꼬우면 한 대 칠래? 너 그거 제일 잘 하잖아. 키득대는 바닐라에 휘트니는 손을 천천히 위로 올린다. 그가 주먹으로 바닐라의 흰 뺨을 내리찍으려고 할 때, 바닐라는 뒷짐을 지고 있던 손을 앞으로 빼낸다. 그리고 손에 들린 무언가로 휘트니의 머리를 강하게 내려찍었다. 둔탁한 통증이 가장 먼저 느껴졌다. 딱딱한 두개골에 강한 충격이 가며 머리가 어지러워 잘 판단이 되지 않았다. 반쯤 뜨인 눈에 뜨겁고 축축한 게 들어와 안구가 따가웠다. 휘트니는 손을 올려 이마를 매만진다. 투명하고 묽고 색 붉은 피가 흰 피부를 적셨다. 아, 이…… 씨이발……. 흙바닥을 손톱으로 긁으며 겨우 몸을 일으킨다. 손톱 사이에 휘트니의 피가 스며든 흙이 낀다.
“너. 미쳤냐?”
“말은 똑바로 해. 네가 한 짓 그대로 돌려주는 건데. 내가 왜 미쳐. 따지면 니가 미친 거지.”
겨우 일어난 휘트니는 바닐라를 보며 몸을 잘게 떤다. 그것이 분노에 의한 건지, 죽음의 문턱까지 닿았음에도 되갚음이랍시고 찾아온 바닐라를 향한 공포에 의한 건지 판단하기가 힘들었다. 바닐라는 어떠한 감흥도 느끼지 못하는 무기질적인 시선으로 휘트니를 바라보다가 그가 손에 든 스패너를 본다. 이거 네가 놓고 간 거야. 조금 있다가 돌려줄게. 태연하게 말하는 모습이 되려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긴. 저게 언제는 마음에 들었다고. 오늘은 바닐라와 더 엮이고 싶지 않았다. 보복심리를 억누르며 가쁜 숨을 내뱉고 있을 때, 바닐라는 큰 표정 변화 없이 그의 정강이를 걷어찬다.
“아, 씹!”
“휘트니.”
“뭐, 이 썅년아.”
“목이 졸리는 거보단 낫잖아.”
“무슨 개소리야. 그건.”
“목 졸려서 손자국 남은 채로 학교에 가봐. 사회 선생이 네 뒤를 뚫으려고 할걸.”
마조히스트가 되었다고 말하면서, 너한테 박으려고 들겠지. 그 미친 선생은 분명 그럴걸. 영문을 모를 말에 휘트니는 미간을 찡그릴 수밖에 없었다. 아니, 그러니까.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무릎을 살짝 굽힌 채 엉거주춤 서 있는 휘트니를 보며 바닐라는 스패너를 든 손을 한 번 더 들어 올렸다. 그리고 다시 휘트니의 머리를 내리찍는다. 머리에서 둔탁한 소리가 났다. 두개골에 금이 가면 꼭 그런 소리가 날 것만 같았다. 아랫입술을 이로 꽉 깨문다. 신체의 모든 피부 중에서 가장 얇은 것이 찢기고 갈라진다. 휘트니의 얼굴은 그의 내부를 순환하는 피에 적셔져 볼품없어졌다. 바닥에 쓰러진 휘트니의 머리맡에 쪼그려 앉은 바닐라의 입술이 벌어진다.
“목이 졸리는 거보단 낫지? 머리가 깨지는 건, 그래도 싸움이라도 한 거 같잖아.”
“……지랄.”
“난 널 배려해 준 거야. 휘트니. 목에 자국이라도 남아봐. 네가 꼭 섹스하다가 목이 졸려지는 마조히스트처럼 보일 거 아니야.”
바닐라는 말을 끝 맺히고서 그의 머리맡에 스패너를 떨어트린다. 이건 가져가. 네 거잖아. 돌려줄게. 스패너가 땅에 떨어지며 축축하게 젖은 흙이 조금 파인다. 휘트니의 숨이 한없이 거칠어졌다. 저 망할 새끼를 바닥에 눕혀서 억지로 박고 싶었다. 아니면 그 어떠한 것도 하지 못하고 포기할 정도로 패고 싶었다. 휘트니는 그가 지금 느끼는 수치스러움을 조금도 덜어내지 않고 바닐라에게 안겨주고 싶었다. 그러나, 휘트니가 아는 방법은 고작 저런 것뿐이다. 애초에 바닐라가 수치라는 감정을 느낄 때가 있기나 할까? 수치심을 알기나 할까? 쟤가, 인간이라면 당연히 느낄 수치심과 무력감을 겪어본 적이나 있나? 휘트니는 바닐라라는 인간을 잘 알지 못한다. 괴롭히고, 이따금 폭력을 가한 것과는 별개로 정말 아는 게 거의 없다. 그가 좋아하는 음식도, 좋아하는 작가도, 음악 취향도 조금만 대화를 섞어봐도 알 만한 것들을 조금도 알지 못했기에 당연히 바닐라의 과거에 대해서도 알고 있는 게 없다.
“야.”
휘트니는 손등으로 흐르는 피를 닦아낸다. 그의 소맷자락에 말라붙기 시작한 피가 묻어난다. 고개를 겨우 들어 바닐라를 바라본다. 실핏줄이 다 터진 탓에 휘트니의 흰자는 붉었다. 바닐라는 선 채로 휘트니를 내려보면서, 말로 형용하기 힘든 감각을 느낀다. 흥분된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불쾌하다고 해야 할까. 뭐가 됐든, 바닥에 납작 누운 채로 몸도 못 일으키고 있는 휘트니를 보고 있자니 기분이 고양된다. 바닐라의 입술 끄트머리가 위로 아주 살짝 올라간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티 나지 않을 옅은 미소였으나, 휘트니는 그걸 아주 쉬이 눈치챌 수 있었다. 뭘, 쪼개. 휘트니의 말에 바닐라는 그제야 그의 입술을 매만진다. 입술이 호선을 그리고 있다. 바닐라는 그게 낯설기 짝이 없었다. 뒤늦게나마 입꼬리를 아래로 내린다.
“이제 와서 내리면 뭐, 달라져?”
“다시 웃어줄까?”
“좆같다. 진짜.”
휘트니는 미간을 찡그린 채로 옅은 신음을 내며 몸을 일으킨다. 그리고 공터에 있는 벽돌벽에 등을 기대어 앉는다. 잘게 떨리는 손으로 담뱃갑을 꺼낸다. 담배를 입에 꼬나물며 라이터를 쥐다가 바닥에 떨어트린다. 바닐라는 그 떨어진 라이터를 주워 휘트니의 담배에 불을 붙여준다. 휘트니는 담배를 몇 번 빤다. 탁한 연기가 허공에 피어오른다.
“갑자기 웬 지랄.”
“라이터도 못 잡는 게 불쌍해서.”
“속 긁는 건 여전히 잘하네. 좆같게.”
바닐라는 휘트니의 옆에 앉았다. 시선을 그에게 둔다. 목에는 휘트니의 손자국이 남아있다. 그 병신같은 사회한테 박히는 건 너일걸. 휘트니는 힘없이 실실 쪼개며 가볍게 말한다. 바닐라는 그 말에 코웃음 친다. 알아서 잘 피하거든. 휘트니는 문득 바닐라가 자신 외의 사람에게도 똑같이 되갚음을 하려고 드는지 궁금했으나, 물어보는 거 자체가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라고 생각했기에 담배를 태우며 연기만 내뱉길 반복했다. 학생들에게 쉬이 손을 대는 선생들이 바닐라를 놓쳤을 리가 없지. 바닐라는 건드려도 큰 문제가 생기지 않을 거 같은 애였다. 체구도 작고, 생긴 것도 유순해선 억지로 취해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게 생겼다. 그래서 내가 건드렸지. 기분이 좋지 않아 미간을 찡그린 채로 담배 필터를 씹어댄다.
“차라리 죽일걸.”
“후회해?”
“존나게 후회하지. 썅년아. 너 같으면 후회 안 하겠냐?”
“손 떼지 말지 그랬어.”
“그래서 후회하고 있잖아.”
“그런데, 휘트니. 나도 후회하고 있어.”
“야. 네가 뭘 후회하는데. 후회할 게 있기나 해?”
“있지. 그것도 꽤 많지.”
바닐라의 시선이 바닥에 떨어진 스패너에 닿는다. 한 번만 더 내려찍을걸. 아니면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세게 때리고서 저 두꺼운 목을 한 번만 졸라볼걸. 숨을 못 쉬어서 죽기 직전까지 목을 졸라줄걸. 그러면 저게, 두 번 다시는 그 지랄을 안 할 텐데. 애매한 대처는 휘트니의 보복심리를 자극할 뿐이었다. 몸을 완전히 벽에 기댄다. 내키는 대로 굴지 않은 게 후회돼. 충동적으로 떠오르는 생각들을 차곡차곡 정리하여 입 밖에 낸다. 그 말에 휘트니는 피가 말라붙은 머리카락을 마구 헤집는다.
“야. 넌 내키는 대로 굴지 않았을 때가 없잖아.”
“만약 내가 내키는 대로 굴었잖아, 휘트니.”
“어.”
“그러면 넌 이미 죽었어.”
바닐라는 이제 습관처럼 휘트니에게 찾아간다. 그와 몸을 섞기 위함이 아니라, 짜증이 난다는 이유로 포장된 폭력성을 해소하기 위해였다. 난 아무래도 시간이 지날수록 널 닮아가나 봐. 휘트니는 끔찍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헛구역질하려고 했으나 바닐라는 진심이었다. 바닐라는 본래 욕망이나 욕구라곤 조금이라도 느낄 수 없던, 산송장에 가까운 삶을 살아오던 건조한 인간이었다. 그의 삶은 휘트니를 만나기 이전과 후로 나뉜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다. 내가 이렇게 된 건, 네 덕분이야. 휘트니. 본래 참다가 되갚음을 하는 것은 성격이었다. 다만 그 되갚음이란 작은 복수에 가까운 행동에서 추잡하다면 추잡한 욕망을 찾아낸 것은 휘트니의 덕이 컸다. 바닐라가 웃는다. 휘트니는 그 미소를 보고 싶지 않아, 눈을 질끈 감을 수만 있다면 감고 싶은 심정이었다.
“난 너로 인해 대물림 된 욕망을 너에게 푸는 거뿐이야.”
유전 같다. 꼭. 너 유전이라는 개념 알아? 수업시간에 계속 자니까, 모를까 봐 물어보는 거야. 모르면 설명해줄게. 바닐라의 목소리는 부드럽다. 말투는 나긋하되 어딘가 딱딱하다. 휘트니는 다 타버린 꽁초를 부러트리고 바닥에 내던졌다. 씨발. 욕하지 않으려고 해도 안 할 수가 없었다. 손가락을 안으로 말아쥔다. 진짜, 개 좆같은 소릴……. 띄엄띄엄 말하면 바닐라가 고개를 옆으로 기울인다. 생각나서 말했을 뿐이야. 큰 의미 없어. 그는 휘트니의 반응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굴었다. 실제로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바닐라라는 인간은 휘트니와 결이 달라도 한참은 달랐기에. 애초에 휘트니는 그가 이따금 인간처럼 느껴지지 않을 때가 종종 있었으니까. 휘트니와 바닐라는 오랜 시간 동안 어쩌면 죽기 직전까지 서로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네가 이상해서 그래.”
“그러면 너도 이상한 거겠지. 아니다. 넌 원래 이상했어. 휘트니.”
휘트니의 눈에는 바닐라가 가장 이상했다. 자신이 정상적이라는 건 아니다. 다만, 이 마을은 모두가 이상하고, 정상적인 인간은 아예 없었기에 상대적으로 휘트니가 정상의 범위에 드는 것에 불과했다. 난 너보단 정상적이야. 미친 새끼야. 너보다는 내가 낫다고. 그렇게 믿고 싶은 건지. 아니면 사실만을 말하는 건지. 휘트니는 부러 같은 말을 입에 담았다. 바닐라는 그의 말에 아주 작게 웃는다. 신경 쓰지 않으면 들리지도 않을 작은 웃음소리가 귓등을 간질인다.
“내가 너 때문에 이렇게 됐는데, 그러면 나보다 네가 더 이상한 거지. 난 대물림을 당한 거라니까, 휘트니.”
바닐라는 그 이유를 핑계처럼 대면서 휘트니를 향한 추잡하고 저열한 폭력성을 감추지도 않을 게 분명했다. 안타깝게도 그것은 휘트니 또한 마찬가지였다. 폭력으로 빚어낸 듯한 인간이어서가 아니라 단순히 바닐라에게 굴복하고 싶지 않아서, 지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싫어서 그의 뺨을 주먹으로 후려치고 이따금 범하려 들 것이다.
“내가 보기엔 넌 원래 그렇게 생겨 먹은 거야.”
근데, 그렇게 생각하고 싶으면 그렇게 생각해. 병신처럼 그렇게 믿으면서 살아. 휘트니는 바닐라와 눈을 맞춘다. 바닐라의 색 옅은 눈 속에는 휘트니가 담겨있다. 저걸 진짜로 죽였어야 했는데. 아니면 기어오르지 못하게 한 대패고 뒤에 내 좆을 처박든가 했었어야 했는데. 뒤늦은 후회에 결국 휘트니는 담배를 입에 또 물 수밖에 없었다. 불붙여줘? 바닐라의 말에 대답하고 싶지 않아 그 작은 머리를 툭 치면 바닐라는 짜증스럽게 휘트니가 습관처럼 내뱉는 욕을 읊조리다가 주먹을 쥐고서 휘트니의 머리를 후려쳤다. 씨발, 왜 지랄인데. 또! 휘트니의 말에 바닐라는 대답한다.
“먼저 때린 건 너야. 휘트니.”
난 항상 널 먼저 때린 적 없어. 아마도. 뒤늦게 말을 덧붙이는 모습이 밉살스럽다. 휘트니는 결국 불을 붙이지도 않은 장초를 반으로 부러트리고서 그것을 바닐라에게 내던졌다. 썅년아. 니 며칠 전에 대뜸 찾아왔었잖아! 그 말에 바닐라는 어깨를 으쓱인다. 바닐라는 하루의 마지막까지 빌어먹을 새끼처럼 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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