海戀歌
아마시로 사다시 x 키리미치 토오루
키리미치 가문은 참으로 특이한 곳이었다. 일본의 색채가 짙은 저택 안에는 영국이나 프랑스를 비롯한 서구권의 문화가 담긴 물건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것은 키리미치 가문의 가주이자 키리미치 토오루의 아버지의 영향으로서 그는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 외 타지에 가본 적이 없으나 새로 들어오는 서구식 문물에 마음을 빼앗겨 가본 적도 없는 영국과 프랑스를 동경한 탓에 벌어진 일이었다. 가문에서 고용한 사용인들이나 키리미치 가문과 연을 맺고 있는 다른 가문은 그 가주가 허영심에 가득 찬 멍청이라고 떠들었으나, 아마시로 사다시는 그의 허영심이나 동경에 대해 어떠한 생각도 없었으며 어떨 때는 미약한 감사를 느끼곤 했다. 아마시로는 키리미치 가문을 이끄는 가주에 의해 일자리를 구한 것과 다름없었다. 휘핑보오이 라고 했던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는 듯 어쩌면 타지의 언어가 익숙하지 않다는 듯이 어눌한 발음으로 말을 길게 늘이며 말했었다. 얇은 장지문 너머에 있는 사용인들은 그런 남자가 우습다는 듯 작게 킥킥댔지만, 아마시로는 그 모습이 딱히 우습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허영심과 사치로 인해 자신이 고용될 수 있었던 것이니까. 생각해보면 아마시로는 어릴 적부터 상황이나 환경에 대한 수긍이 빨랐다. 부정할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이고, 바꿀 수 없는 것은 빠르게 적응하는 것이 삶의 이치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잘 풀리면 좋은 거고, 안 풀리면 적응해야 하는 법이다. 그런 생각 하나 덕분에 아마시로는 각박하다면 각박한 삶을 아무 생각 없이 견딜 수 있었다. 무던한 성격이라고 한다면 무던한 거고, 나쁘게 말하자면 수긍이 빠르고 무관심한 아마시로를 키리미치 가문의 그 남자는 퍽 마음에 들어 했다.
내게는 아들이 있다. 가문의 유일한 장자이기도 하지.
키리미치 가문의 장자가 태어났을 때는 유독 아이가 많이 죽어가던 때였다. 기후가 온화한 봄, 후덥지근한 열기와 습기가 뒤섞인 여름, 벼가 기우는 가을. 뽀얀 입김이 피어오르는 겨울…… 그 어느 때를 가리지 않고 막 태어난 따뜻한 생명체는 쉬이 죽어갔다. 전염병이 돈 것도 아니고, 먹을 것이 없어서도 아니다. 그냥 많이 죽어갔다. 그런 때에 태어난 키리미치는 진귀한 보물처럼 자랐단다. 쉽게 더러워지는 비단을 둘러 입히고, 입에 들어가는 음식은 가장 신선하고 비싼 재료로 만들어졌으며, 혹여나 넘어지기라도 하면 용하다고 소문이 난 의사를 불렀단다. 아마시로는 그 갓 태어난 것에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부러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어찌 됐든, 귀하게 자라난 키리미치는 그에게 주어진 환경과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유순한 아이로 자랐다고 한다. 쉽게 웃고, 쉽게 말하고, 쉽게 대하고. 모두가 평등하다고 생각하는…… 서민들 사이에서 돌아다니는 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아이라고 했다. 키리미치의 남자가 말하기엔 그랬다.
너는 이제 우리 토오루의 휘피잉구, 보오이가 될 거다.
휘핑보이란 그들이 태어나기 전, 영국에 있던 문화라고 했다. 아마시로에게 주어진 설명은 그게 끝이었다. 무얼 하면 되는지는 이 저택 내에서 가장 오랫동안 일한 하녀, 토오코에게 물으면 된다는 말을 끝으로 남자는 아마시로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아마시로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토오코의 손에 끌려 제가 모실 도련님에게 가야만 했다. 우선 너는 토오루 도련님의 옆에 있으면 돼. 주인님께서 도련님의 가정교사인 쿄우 님과 미츠코 님께는 다 설명해두었어. 그렇게 말하더니 토오코는 뒤를 돌아 아마시로를 바라보았다. 아직 어리던 아마시로를 내려보던 토오코는 혀를 차며 닫고 있던 입을 떼어냈다. 딱한 것.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은 아마시로가 타인에게 처음으로 받아본 싸구려 동정이다. 불쾌하진 않았으나, 그렇다고 유쾌하지도 않았다. 아마시로는 그때를 분명히 기억한다. 단단한 나무로 만들어졌지만, 세월에 의해 낡은 바닥은 찼고 발이 닿을 때면 삐걱거렸다. 도련님은 지금 가장 안쪽 방에서 공부하고 계신단다. 토오코는 색 짙은 정적을 못 견디겠다는 듯 이따금 묻지도 않은 걸 말했다. 대답을 바라진 않았는지 아마시로가 입을 꾹 닫고 있었는데도 무어라 말하진 않았다. 아마시로는 토오코의 손에 이끌려 가장 안쪽의 방으로 가는 동안, 정원을 보았다. 자갈이 깔린 정원은 고즈넉하고 단아하게 잘 꾸며져 있다. 드문드문 보이는 서구식 장식이 우스꽝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다 왔단다.
토오코는 아마시로가 입고 있던 헌 옷을 몇 번이나 정돈해주었다. 그것은 그녀가 가지고 있는 죄책감을 덜기 위한 행동이기도 했다. 도련님과 나이가 비슷하구나. 그리 말하던 여자는 아마시로의 작되 부드럽진 않은 손을 몇 번이나 매만졌다. 그리고 몸을 일으켜 장지문을 열었다. 그곳에는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키리미치가 있었다. 그의 앞에 선 쿄우 님이라 불리는 남자는 얇은 채찍을 든 채로 곤혹스럽다는 듯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휘피잉구…… 하아, 주인님께서 말씀하신 그 아이입니다. 쿄우 님.
쿄우의 시선은 아마시로에게 향한다. 아마시로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가볍게 훑어본 남자는 손짓한다. 그러면 토오코는 아마시로의 등을 방 안으로 떠밀었다. 키리미치는 눈물을 훌쩍이면서도 방으로 들어온 또래에게 관심을 가졌다. 아마시로는 그때를 잊지 못한다. 얇은 채찍으로 제 손바닥을 탁탁 두드리던 쿄우를.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시끄러운 울음소리를. 자신에게 천천히 다가와 손을 내밀라는 쿄우. 그의 큰 손에 손을 겹치자, 그는 태연하게 손을 돌려 손바닥이 위로 향하게 했다.
오늘부터 네 일은 도련님이 잘못하면 대신해서 체벌당하는 거다. 이해했지?
아마시로는 그제야 왜 자신이 이 저택에 고용될 수 있었는지 이해했다. 그리고 수긍했다. 부조리함에 억울해하고, 억울하기에 분노하기에는 아마시로는 너무나 건조한 사람이었다. 채찍이 손바닥에 닿아 마찰하는 소리가 날 때도 아마시로는 미간을 살짝 찡그릴 뿐, 신음조차 내지 않았다. 그 광경에 눈물을 더 흘리는 건, 키리미치였다. 쿄우 님. 쿄우님. 그러지 마세요. 잘할게요. 흐느끼는 키리미치에 쿄우는 결국 그날 수업을 모조리 망쳤다. 화끈거리고 붉게 달아오른 피부를 보며 키리미치는 형태가 다 갖춰지지 못한 눈물만 뚝뚝 흘려댔다. 아마시로는 키리미치가 참 별나다고 생각했다. 왜 우는 걸까. 울 이유가 있기나 한가. 소년은 적지도 많지도 않은 급여를 받게 될 테고, 먹을 것과 잘 곳을 제공 받으며 이 일을 하는 건데. 자기는 아프지도 않을 텐데. 그 의문은 낮에서 밤까지 이어졌다. 그것은 얇게 저민 고기를 손바닥에 얹어주는 키리미치를 보았을 때부터 지금까지 끊어지거나 얇아지지 않고 그 형태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태어난 아이가 다 죽어가던 그해에 키리미치 가문에 태어난 유일한 장자는 심적으로 유약했다. 물렀고, 순했고, 어딘가 모자라 보였다. 그래서 아마시로는 키리미치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사람은 가지지 못한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하기 위해 계속 지켜보며 종극엔 동경하거나 싫어하게 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는 성년을 맞이한 지금까지도 궁금했다. 저 세상 물정 모르는 도련님을 자신이 싫어하게 될지, 아니면 동경하게 될지. 그것도 아니라면…….
❁
“사다시! 이거 먹어봐!”
“이런 건 사용인이 먹으면 안 되는 겁니다.”
“그런 게 어디있어~.”
“토오코 님께서 그리 지시하셨으니 아마도 주인님의 지시겠지요.”
토오루 도련님의 아버님이 그리 지시하신 듯 모양입니다. 성년을 맞이한 아마시로는 키리미치를 보다 더 잘 다룰 수 있게 되었다. 다룰 수 있다기보다는 달래는 법을 터득한 것에 가깝다. 그의 도련님은 이상한 부분에서 단순했고, 따져봐야 영양가 하나 없고 기운만 빼게 정도로 쓸모없는 곳에선 깐깐하게 굴었다. 지금의 상황을 예로 들자면, 당고 하나 먹이지 못했다고 입술을 비죽 내밀고 아버지도 참, 하며 투덜대는 모습은 유서 깊은 가문의 도련님이 보일 행동과는 거리가 멀었다. 토오루 도련님. 다른 가문의 장자들은 사용인에게 당고를 주지 않습니다. 그리 말하면 키리미치는 미간을 아주 살짝 찡그렸다.
“다른 가문에서 일해본 적 있어?”
“없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말해?”
“통상적으론 그러니까요.”
“다른 애들은 어떤데?”
“아마 주인님께 여쭈어보는 게 빠르실 듯한데.”
“아버지는 좀 불편해~. 매일 나랑 다른 사람을 비교한단 말이야.”
“아끼시니까 그런 거겠지요.”
“무슨. 그럴싸한 아들이 가지고 싶은 거겠지.”
어디에 내놓아도 그럴싸하고, 흠잡을 곳 없으며 완벽하단 단어가 잘 어울리는 인간상. 그의 아버지는 키리미치가 그런 인간이 되길 바랐다. 아마시로는 이따금 그게 일종의 촌극처럼 느껴지곤 했다. 인간은 완벽해질 수 없고, 애초에 그 자신마저 완벽하지 못한데. 왜 키리미치가 완벽하길 바라는 걸까. 더군다나 키리미치는 그가 원하는 인간이 되지 못할 것이다. 결점이 많다는 게 아니라, 키리미치는 지나치게 감정적이었으니까. 웃고 싶을 때는 웃고, 울고 싶을 때는 울고. 화를 내고 싶을 때는 화를 내다가도 기분이 풀리면 유순한 미소를 머금는다. 완벽이라는 단어에서 느낄 수 있는 인간상과 키리미치는 거리가 멀다 못해 완벽히 동떨어져 있다. 그걸 알고 있기에 아마시로는 이따금 키리미치를 감히 동정한다. 모두가 키리미치 대신 매일 매 맞는 아마시로를 동정하고 어떨 때는 업신여기지만, 아마시로 만큼은 키리미치를 불쌍히 여긴다. 주위의 모든 사람이 그에게 완벽을 요구하는데, 본인은 일평생 완벽하지 못한 인간일 거라는 점이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연기라도 잘 할 수 있었으면 좋았으련만. 아마시로가 윗입술로 아랫입술을 내리누르자 키리미치는 그의 눈치를 살핀다.
“……미안해. 사다시. 나 때문에, 항상.”
“상관없습니다. 도련님. 애초에 그게 제 일이기도 하고요.”
“당연한 건 아니잖아. 아프기도 하고.”
“괜찮아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마시로는 앉아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장지문을 연다. 퀴퀴한 먼지 냄새가 코점막에 달라붙었다. 미츠코 님이 오실 시간이지요. 아마시로의 말에 키리미치의 미간이 좁아진다. 이렇게 말하면 안 되지만, 나는 미츠코 씨가 불편해. 투정 부리듯 내뱉는 말에 아마시로는 아주 옅은 미소를 입에 머금는다.
“그래도 하셔야죠.”
“알아! 그러니까 더 싫어!”
“미츠코 님께서 들으십니다.”
“아, 그건 안 되는데.”
“방에 들어가 계세요. 열병을 앓으실지도 모릅니다.”
키리미치는 아마시로의 말에 따라 순순히 방으로 들어간다. 그러면 아마시로는 방 한구석에 무릎을 꿇고 앉는다. 그리 부드럽지 못한 천에 종아리 살이 닿자 통증이 일었다. 욱신거리고, 따갑고, 고름이 터져 천이 조금 축축해진다. 아마시로는 아랫입술을 이로 조금씩 씹어대면서도 신음을 내뱉지 않도록 부단히 노력했다. 옷자락이 아마시로의 손에 의해 구김이 진다. 오늘은 손바닥이려나. 아마시로는 손바닥을 맞는 게 가장 귀찮았다. 맞을 때,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미간을 찡그리는 키리미치를 바라보는 것도 싫었고, 밤마다 얇게 저민 날고기를 붙이러 와주는 키리미치 때문에 밤 동안 손을 쫙 편 채로 잠들어야만 하는 것도 번거로웠다. 하지만, 그것은 모두 아마시로만의 몫이다. 쿄우 님이나 미츠코 님이 그의 신세나 상황을 이해해줄 이유는 전혀 없다. 얕은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 반쯤 열려있던 장지문이 완전히 열렸다. 풀을 빳빳이 먹여 주름 하나 지지 않은 기모노를 입은 여자가 방에 발을 들인다.
“안녕하세요. 토오루 님.”
그리고, 사다시. 아마시로는 미츠코를 향해 고개를 살짝 숙였다. 여자는 그걸 흘겨보다가 키리미치 맞은편에 준비된 자리에 앉는다. 키리미치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토오루 님. 지위가 높은 사람이라면 고개를 들어야 하십니다. 미츠코는 나지막이 말한다. 아마시로는 오늘도 미츠코가 든 채찍이 제 종아리나 손바닥에 닿을 것을 직감했다. 잦은 실수 탓에 키리미치는 언제나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기가 죽어있었다. 그 탓에 아마시로의 여리지 않던 살은 항상 채찍을 맞은 탓에 남아나지 않았다. 이제는 종아리에 굳은살이 박일 지경이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저렇게 태어난 키리미치를 원망하는 건, 그가 맡은 역할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마시로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부디 키리미치가 더 빨리 성장하길 바랄 뿐이었다.
“사다시.”
“네. 미츠코 님.”
“이리 오세요.”
“알겠습니다.”
미츠코는 손에 말가죽으로 만들어진 채찍을 쥔다. 저것은 키리미치의 아버지가 서양에서 사 온 것이었다. 사치스럽기도 하지. 채찍 정도는 일본 내에서 만든 것을 사면 될 것을. 아마시로는 익숙하게 천을 걷어 올린다. 붉은 실선과 피딱지, 고름이 남아있는 피부가 드러난다. 미츠코는 그것을 보며 혀를 끌끌 찼다. 토오루 도련님. 사다시에게 조금이라도 미안한 마음이 있다면, 다음에는 더욱더 성장한 모습을 보여주시길 바랍니다. 아시겠지요. 미츠코의 말투는 잘 배운 사람의 억양이다. 조곤조곤하고, 뭉개진 발음이 없으며, 그녀의 외관과 행실처럼 단아하기까지 하다. 키리미치는 그 모습을 보며 어떠한 말도 하지 못했다. 고개를 숙인 채로 입술을 달싹이고 있다. 뺨에 묻어난 식은땀이 어딘가 애처롭다.
“죄송, 죄송합니다.”
“저에게 죄송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다음에는 더욱, 성장한 모습을 보일 테니…… 사다시를 때리는 것은 재고해주시면 안 될까요. 미츠코 님.”
“토오루 님.”
“……네.”
“토오루 님 정도의 지위를 가진 분은 본래 본인의 자리에 맞는 책임을 져야 하는 법이지요.”
“네. 충분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미츠코가 토오루 님의 선생이라고 한들 지위가 더 높은 분께 더군다나 남성이시며, 성인이 되신 분께 손을 올리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 않나요.”
미츠코가 무어를 말하는지 이해한 키리미치의 안색은 서서히 창백해진다. 희게 질린 낯을 보며 미츠코는 아주 부드러이 웃는다. 그는 미츠코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다. 이제는 낯설지 않은 통증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아마시로는 옷자락을 쥔 손에 더 힘을 주었다. 미츠코가 채찍을 쥔 손을 든다. 여자의 손에 들린 채찍은 아마시로의 종아리에 닿는다. 얇은 채찍이 피부를 때릴 때마다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은 파찰음이 났다. 키리미치는 그 소리가 들릴 때마다 몸을 움찔거렸는데, 그것은 미츠코의 심기를 거스르기 충분했다. 고름과 피가 터져 피부를 더럽힌다. 아마시로의 이가 마냥 얇지 않은 아랫입술에 닿는다.
“똑바로 보세요. 토오루 님.”
“하지만…….”
“토오루 님의 행동 탓에 사나시가 이렇게 매질 당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고풍스럽다. 모순되게도 고풍스럽기에 천박하기 그지없다. 아마시로는 매질을 당할 때면 키리미치를 원망하기보단 이 행위의 시발점과 행하는 사람에 대해 생각하곤 했다. 과정은 매번 달랐지만, 결론은 대부분 비슷했다. 천박하다. 추하다. 겉보기에만 신경 쓴 것과 다를 게 없다. 그리 생각한다고 한들 어떤 것도 변하지 않을 것이고 어떤 것도 변화시키지 못할 걸 알면서도 아마시로는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 일종의 버릇이자 습관으로 남아버려 이제는 고치려 해도 고칠 수 없는 것이었다.
“미츠코 님. 제발요.”
키리미치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미츠코에게 걸어간다. 그녀의 옆에 앉아, 여자의 손목을 잡고 애원한다. 미츠코는 결국 키리미치의 행동에 미간을 좁혔다. 얕은 한숨을 내뱉고서 관자놀이를 엄지로 꾹꾹 누른다. 이걸 키리미치 이 보신다면 경을 치실 거예요. 자각은 하고 계신 거죠? 미츠코가 드물게 짜증스레 말한다. 그것은 여자가 아마시로를 향한 매질을 멈춘다는 것이었다. 키리미치는 그걸 알고 있기에 손에 힘을 살짝 풀었다. 안심했다는 듯 얕은 숨을 내뱉는다. 아마시로는 손에 쥐고 있던 천을 놓았다. 채찍에 의해 다 찢어지고 터진 상처가 그제야 가려진다.
“다음에는 이 정도로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아시겠지요?”
“네, 네. 다음에는 꼭…… 더욱 성장한 모습으로 뵙겠습니다.”
“다음 수업은…… 열 밤이 지난 뒤로 하시지요.”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미츠코 님.”
“그리 말하지 마시구요. 저는 토오루 님보다 아랫사람입니다.”
“제 선생님이시니 말씀을 낮추기가 힘드네요.”
“말은 항상 잘하시지요.”
미츠코는 챙겨온 것들을 챙긴 뒤에야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마시로는 키리미치의 뒤에 서서 미츠코를 배웅한다. 곱게 틀어 올린 머리는 얇은 머리카락 하나 삐져나와 있지 않았는데, 그것이 키리미치의 덥수룩한 머리카락과 사뭇 대비되었다. 다음에 만나 뵐 때는 머리도 잘 정돈된 상태였으면 합니다. 그러면, 다시 만나 뵐 날까지 건강하시길. 미츠코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방 밖으로 나선다. 키리미치는 미츠코가 긴 복도의 작은 점이 되어 곧 사라질 때까지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그의 사소한 말 하나가 아마시로의 상처가 된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는 것처럼 굴었다. 아마시로는 방에 내려앉은 정적을 더 오랜 시간 음미하고 싶었으나, 지금 자신이 모시고 있는 여리디여린 도련님께선 이런 것을 견디지 못하시니 먼저 입을 떼어냈다.
“오늘도 고생하셨습니다.”
그 말에 키리미치는 다시금 눈물을 흘려댔다. 미안, 해. 미안, 내가 그러려고 한 게 아니라서. 네가 맞는 건 정말 싫은데. 어눌하고 뭉개진 발음으로 띄엄띄엄 말하는 모습이 안타까우면서도 귀찮다. 어차피 당신은 당신의 일을 한 것이고, 나는 나의 일을 한 것에 불과한데. 왜 이렇게까지 사과하고, 눈물을 흘리는 걸까. 아마시로는 이럴 때마다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타인에게 공감하는 게 힘들다고 한들 지능이 낮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지만, 이럴 때만큼은 자신이 꼭 지능이 조금 모자란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입술을 달싹인다. 그러다가도 곧 입을 꾹 닫는다.
“미안해. 정말로. 사다시.”
“괜찮습니다.”
“아프잖아.”
“제 일이니 괜찮아요.”
“매질 당하는 게 일이라는 게 이상하다는 생각은 안 해봤어?”
“이상하다고 생각한다고 한들, 달라질 게 있나요?”
순응하지 못하면 비참해질 뿐이다. 아마시로는 비참의 두렁에 갇힌 사람을 수없이 봐왔다. 제 처지를 비관하여 천주교를 믿던 자는 박해당해 죽었고, 인생을 한탄하던 남자는 검사에게 시비를 걸다가 목이 베였다. 높으신 분들만 잘사는 세상을 비판하던 자는 돈이 없어 겨울이 다 지나기도 전에 얼어 죽었다. 그들에 비해서 아마시로의 처지는 한참 나았다. 우선, 살아있지 않은가. 살아있다면 된 거다. 살아만 있으면 뭐든 할 수 있다. 적어도 밥을 주고, 잠을 잘 수 있는 곳을 내어주시지 않나요. 아마시로의 목소리는 지독하게 나긋하다. 말투는 무던하기 짝이 없다. 키리미치는 아마시로와 눈을 맞춘다. 그의 눈동자는 장지문 종이가 다 흡수하지 못한 빛을 받아 미약하게 반짝이고 있다.
“그건, 그건 있잖아.”
“네?”
“꼭, 가축…… 같잖아.”
키리미치는 자기가 말한 주제에 놀라 입을 손으로 틀어막는다. 미안. 정말, 미안해. 아마시로는 키리미치의 말을 모독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건 알고 있으나,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도 생각한다. 이해하지 못할 수 있다. 그는 아마시로와는 다른 환경에서 자라왔으니까. 키리미치가 비단옷을 입을 때, 아마시로는 버려진 헌 옷을 주워 입혀졌다. 질 좋은 음식으로 배를 채워갈 때, 그는 딱딱하게 굳은 밥알을 굳힌 것을 먹으며 주린 위장을 채웠다. 그럴 수 있죠. 생각이 결론에 다다랐을 때, 아마시로는 아무렇지 않게 말한다. 괜찮습니다. 정말로요. 신경 쓰지 마세요. 토오루 님. 달래기 위해 한 말인데도 키리미치의 표정은 풀릴 기미도 없었다.
“표정 푸세요. 이대로 나가시면 사용인들이 신경 쓸 겁니다.”
“……하지만.”
“전 괜찮습니다.”
“미안해서…….”
상냥하다고 해야 할까. 세상 물정을 모른다고 해야 할까. 뭐가 됐든, 지금의 키리미치를 본다면 아마시로는 그의 아버지에게 종아리를 보여야 할 것이 분명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아마시로는 처음으로 먼저 키리미치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발을 떼어냈다. 사다시, 사다시? 키리미치가 그의 이름을 불러댄다. 네, 도련님. 사다시입니다. 아마시로, 사다시입니다. 이름을 잊지는 않았어요. 아마시로는 키리미치를 데리고 뒤뜰로 향한다. 그곳은 사람의 발길이 적게 닿아 관리가 잘 되어있지는 않았지만, 그렇기에 풀이 잔뜩 죽은 도련님을 데리고 가기 아주 좋은 장소가 되곤 했다.
“넌 내가 울 때 항상 여기에 데려오더라.”
“싫으셨나요.”
“아니. 좋아서. 둘이 있으니까, 마음이 편하기도 하고.”
“다행이네요. 도련님.”
“넌 정말 화 안 나?”
“어떤 것에서요?”
“나 때문에 맨날 매질을 당하잖아.”
“그건 제 일이라고 몇 번이나 말씀드렸습니다.”
일 때문에 화를 내나요? 안타깝게도 아마시로는 이상하게 메마른 사람이라서, 키리미치의 죄책감에 아주 조금도 공감할 수 없었다. 공감하는 척을 하기도 영 힘들었다. 그는 눈동자를 옆으로 굴리다가 느리게 입을 떼어낸다. 어차피 저는 그 일로 매달 삯을 받고 있는데요. 토오루 님. 제게 미안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항상 말씀드리지만요. 잔잔하기 짝이 없는 말투, 지독한 염세주의자를 닮은 시선. 키리미치의 시선은 아마시로의 얼굴에 닿아있다. 아마시로는 언제나 잔잔한 파도와 같다. 아주 어릴 때, 딱 한 번 보았던 바다의 수면을 닮아있다. 감정의 변화가 적은 표정은 아마시로를 그것과 닮아 보이게 만들었다. 키리미치는 입술을 달싹인다. 그러나, 쉬이 말을 내뱉을 수는 없었다. 손가락을 연신 안으로 말아쥐고 펼치길 반복하다가 결국 아마시로의 옆으로 한 발짝 다가간다.
“추우신가요?”
“아니. 그런 건 아니야.”
“몸이 차시면 말씀하세요. 제 겉옷을 벗어드리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어~. 있지, 사다시. 나한테까지 안 그랬으면 좋겠어.”
“……무엇을?”
“눈치 보는 거?”
“저는 도련님의 눈치를 본 적은 없습니다.”
“그러면?”
“제가 모셔야 할 분이 도련님이니 신경을 써드린 거뿐이죠.”
“하하! 사다시가 그렇게 말하니까, 뭔가 안 어울리고 웃기다.”
아마시로의 고개가 옆으로 기운다. 어울리지 않는 건 무엇이고, 또 어울리는 건 무엇인지. 제 도련님은 항상 특이하기 그지없었다. 무채색의 저택 속에서 유일하게 색을 가진 인간처럼 비추어질 때가 종종 있었다. 하지만 아마시로는 그걸 일평생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에게 주어진 것에 그걸 말할 수 있는 권리는 없었으니까. 아마시로에게 주어진 권리라곤 이따금 키리미치와 그림자가 겹쳐도 괜찮은 것과 이렇게 사람의 눈을 피한 장소에서 서로를 마주 보고 대화를 나누는 것. 그리고, 키리미치의 잘못으로 인해 생겨난 타인의 체벌을 대신 받는 것. 아마시로는 그에게 주어진 것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말하지 않을 것이다. 주제넘으니까. 키리미치가 더 자주 자신을 바라볼 것 같아서. 그리고, 무언가가 변할 거 같다는 파란의 예감이 들어서…….
“역시 날이 춥네요.”
아마시로는 문득 떠오르는 생각과 변화에 대한 불안을 지워내고자 드물게 먼저 입을 열었다. 정원에서 저택의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대부분 키리미치에 의해 이루어졌었다. 하지만 오늘은 아마시로가 먼저 말을 꺼냈다. 그것은 간접적인 요구와 같다. 그의 말은 뽀얀 입김과 함께 허공에 피어오른다. 키리미치는 아지랑이처럼 힘없이 흩어지는 입김을 보다가 입을 떼어낸다.
“추워, 사다시?”
그러면 아마시로는 잠시 고민하다가 네, 하고 대답한다. 몸이 으슬으슬 떨릴 정도로 춥지는 않았다. 조금 쌀쌀하다, 정도의 감상이 들었으나 그리 말한다면 키리미치는 당장은 들어가고 싶지 않다고 할 것이 분명했기에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도련님에게 감히 거짓을 고했다. 퍼석하게 마른 입술을 혀로 훑는다. 이대로 있다가 열병에 걸릴지도 모르겠어요. 누구를 대상 하는 말인지 확실하지 않게 말하자 키리미치는 그제야 팔을 쓸어내린다. 이런 날에는 열병에 걸리는 걸 조심해야 한다고, 약사가 그러긴 했었지. 도련님은 그리 멀지 않은 과거를 떠올린다. 그리고 곧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가자, 사다시. 네가 감기에 걸리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 우습게도 아마시로는 그 말을 키리미치에게 하고 싶었다. 그리고 묻고 싶었다. 당신은 왜 그렇게 날 신경써? 그는 키리미치가 무척이나 추운 밤에 사용인이 준비해 둔 얇게 저민 고기를 들고서 방에 딸린 작은 쪽방에 들어올 것을 알고 있다. 그곳은 북향이라 공기가 찬 것을 개의치도 않고, 종아리에 고기를 한 장 한 장 얹어줄 것 또한 쉬이 예상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키리미치는 그와 아마시로가 아주 어릴 적부터 그랬으니까. 일종의 습관이나 버릇처럼 어떨 때는 거르면 안 되는 의식처럼. 아마시로가 매질을 당한 날이면 키리미치는 손에 얇게 저며낸 소의 고기를 들었다. 그게 더러운 줄도 모르는 것처럼 굴었다. 지금 생각해도 키리미치는 참으로 상냥하기 짝이 없는 도련님이었다. 나 같은 하인이 아니라, 평범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 그의 하인이었더라면 친절과 상냥함에 감복하였을지도 모른다.
“도련님도 감기에 걸리지 않으시게 조심하세요.”
“걱정해주는 거야?”
“도련님을 돌보는 것도 저의 일이니까요.”
“일이라서 걱정하는 것뿐이야?”
아마시로가 키리미치와 눈을 맞춘다. 키리미치는 고개를 옆으로 기울인다. 일이라서, 그런 거야? 다시금 말하는 게 어지간히 대답을 듣고 싶은 모양이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곤란했다. 그를 돌보거나 키리미치 대신 매질 당하는 일에 아마시로의 의견이나 생각은 그리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더 나아가 일에 대한 것을 아주 깊이 생각할 정도로 아마시로는 감성적인 사람이 못 되어서…… 그는 한참 말을 골랐다. 생각하기 위해 시간을 번 것에 가까웠다. 키리미치는 인내심을 가지며 아마시로의 대답을 기다린다.
“……그러면 이상한가요?”
아마시로는 결국 그런 말밖에 할 수 없었다. 그는 키리미치처럼 감성적이지 못하며, 다정하지도 않고, 상냥한 인간이 되지 못했다. 태어나길 그렇게 태어났고, 삶의 결이 다른데 어떻게 그를 닮을 수 있을까. 그를 닮길 바란다면 그것은 동경이 아닌 오만에 가까운 희망이다. 키리미치는 아마시로의 눈동자를 바라본다. 투명한 청색이 유리구슬처럼 반들거린다. 그것은 어떠한 감정도 담겨있지 않아 가만히 바라보고 있을 때면 속이 공허해지는 듯하다. 결국 키리치미는 먼저 시선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회색과 검은색의 눈동자를 덮은 망막에 가지치기가 잘 되어 깔끔하게 자라난 소나무와 드문드문 피어있는 잡초 따위가 맺힌다.
“오늘 밤에는 눈이 내릴 거 같아.”
“그렇군요.”
“하늘이 흐리잖아.”
“오늘은 따뜻한 물이 든 수통을 껴안고 주무시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사다시도 줄까?”
“수통은 도련님과 주인님 그리고 주인마님만 껴안고 주무실 수 있으니 저는 괜찮습니다.”
학습한 듯한 미소를 입에 머금는 아마시로에 키리미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선을 넘지 않으려는 아마시로가 이따금 답답했지만, 그것마저 꾸짖는 건 아마시로에게 너무 가혹한 처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키리미치가 먼저 정원에서 등을 돌리자, 아마시로는 그제야 따라 몸을 돌린다. 너는 내가 추운 곳에 반나절을 서 있으라고 해도 서 있을 것 같아. 그리 말하면 키리미치와 함께 성년을 맞이한 남자는 입술을 달싹인다. 퍼석하게 마른 입술이 갈라지며 통증이 일만도 한데 미간 한 번 찡그리지 않는다. 아마시로는 언제나 키리미치가 무어라 말하면 아주 짧은 시간 동안 뜸을 들였다.
“도련님께서 그러시는 이유가 있겠죠.”
“화도 안 나?”
“화가 날 이유가 있나요.”
“안 날 이유는 또 없잖아.”
“그렇다고 모시는 주인에게 화를 내는 건, 몸종이 보일 행동은 아니죠.”
바보 같은 사다시. 멍청한 사다시. 내가 없으면 아버지는 쟤를 본인의 화풀이 용도로 사용하겠지. 내가 없으면, 쟤는…… 이 집에서 잡일이나 도맡아 하다가 쓸쓸하게 죽어가겠지. 키리미치는 이따금 이 집이 답답해 미칠 거 같으면서도 어디론가 홀연히 떠날 생각은 하지 못했다. 자신의 몸종인 아마시로가 눈에 밟혔기 때문이었다. 학문과 가문을 잇기 위한 교육만 받은 탓에 다른 건 아무것도 하지 못하여 하인이나 몸종이 없으면 사소한 것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키리미치였지만, 그런 그라도 타인을 동정할 줄은 안다. 그는 아마시로의 인생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그렇지만, 평탄한 삶을 살아오지 않았다는 건 알고 있다. 그렇기에 감히 동정하는 것이다. 융통성도 없어 아프다는 말 한 번 하지 못하고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질 당하는 아마시로가…… 신경 쓰였고, 안쓰러웠고, 참으로 딱했다.
“말이 그렇다는 거야.”
“네?”
“내가 널 겨울철에 밖에 세워둘 리가 없잖아.”
“그러실 수 있죠. 그러셔도 됩니다.”
“아냐. 안 그럴 거야. 정말로.”
키리미치가 복도에 발을 올린다. 끝없이 이어진 듯한 복도는 사람의 혈관처럼 길지만, 마냥 꼬여있지도 않다. 드문드문 걸려있는 서구식 그림이 한없이 이질적이다. 그거 알아, 사다시? 우리 집에는 빚이 무척이나 많대. 아버지가 사치스러운 취미를 이어가시는 탓인가 봐. 키리미치는 꼭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무관심하게 말한다. 아마시로는 그제야 벽에 걸린 그림 한 점을 본다. 낯선 화풍, 일본에선 사용하지 않을 안료. 한없이 낯설게만 느껴지는 그림은 아마시로에게 큰 감흥을 주지 못했다.
“이런 걸 보면 너라도 감동하거나 그래?”
“어떠한 생각도 들지 않는 거 보면 감동까진 하지 않는 모양이에요.”
“나도 그래.”
그냥, 이상한 그림 같아. 아마시로는 그림을 바라보는 키리미치의 옆모습을 흘겨본다. 망막에 맺힌 그림의 색은 다양하다. 붉고, 노랗고, 푸르다. 생동감이 넘치는 그림은 도련님의 눈동자 속에서 그 생기를 잃는다. 난 아버지가 왜, 이런 게 좋다고 하시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 나지막이 내뱉은 말에 얕은 한숨이 섞인 듯하다. 아마시로는 말없이 뒷짐을 진 채로 키리미치의 뒤에 선다. 취미는 본래 타인에게 이해받기 힘든 법이죠. 그게 더욱이나 수집과 관련된 것이라면요. 한참을 고민하던 남자는 기분이 그리 좋아 보이지 않는 키리미치를 달래기 위해 최대한 말을 순화하여 내뱉는다. 키리미치는 손을 위로 뻗는다. 그의 손이 기름으로 만들어낸 안료로 그려냈다는 그림에 닿는다. 우둘투둘하게 마른 안료가 피부를 간질인다.
“이해를 못 하겠어.”
“주인어른과 취향이 다르신 걸 수도 있죠.”
“난 만약 내가 예술을 그렇게 사랑한다고 해도, 집안이 망할 정도로 사들이진 않을 거 같아.”
“……성격과 견해의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내뱉어선 안 될 외람된 말이었다. 자각은 있다. 다만, 아무도 듣고 있지 않으니 괜찮을 듯하여 아마시로는 말을 중간에 끊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티 나지 않게 키리미치의 눈치를 살핀다. 다행히도 키리미치는 불쾌하지 않은 듯했다. 그러면 좋겠다. 그림에 닿아있던 키리미치의 손이 아래로 향한다. 방으로 돌아가자, 사다시. 나긋한 어투와 달리 가라앉은 목소리. 생기 없는 얼굴. 모든 게 그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걸 알려준다. 아마시로는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로 키리미치의 뒤를 따라 걸었다. 교육받은 것처럼 그의 그림자도 밟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키리미치의 기분이 더 나빠지지 않기를 속으로 기도하며. 걸음을 느리게 옮긴다.
“차를 준비할까요?”
“응. 부탁할게.”
“다과는요?”
“……오늘은 별로야.”
“그러면 차만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마시로는 키리미치의 뒤를 따라 걸으며 생각한다. 이 집이 망하면 난 어디로 가야 하지? 아슬아슬하게 지키고 있던 거리감이 무너지는 순간,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아마시로의 발이 그 바닥에 닿는다. 그는 뒤뜰의 정원을 등진 채로 가만히 선다. 뒤따르던 발소리가 멎자 키리미치는 등을 돌려 아마시로를 바라본다. 왜 그래, 사다시? 혹시 매질 당한 다리가 많이 아파? 업어줄까? 피곤해 보이는 얼굴에 걱정이 스민다. 참 이상했다. 왜 그걸 보고 있자니, 기분이 묘하게 들뜨는 걸까. 아마시로는 입술을 꾹 내리누른다. 빌어먹을 정도로 상냥한 도련님. 저 도련님이 이 저택 밖에서 살아남을 수나 있을까? 사실상 아마시로는 이 집안이 망하더라도 살아갈 수 있었다. 모아둔 돈도 있었고, 성정 자체가 적응이 빠르고 생활력이 강한 터라 어디로 가더라도 잘 살아갈 것이다. 하지만, 키리미치 토오루는? 저택 안에서도 주인어른이 바라는 대로 자라지 못한 연약하기 짝이 없는 존재가 밖에서 살아갈 수 있기나 한가?
인정하기로 했다. 지금, 아마시로는 감히 키리미치를 걱정한다. 참으로 주제도 모르는 행동이었다. 몸종인 주제에. 고용된 사용인인 주제에. 키리미치 대신 매질 당하는 역할에 불과한 자신의 처지를 알고 있음에도. 아마시로는 키리미치가 걱정되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런 주제에 어떠한 말도 하지 못하는 게 모순적이기 짝이 없다. 손가락을 안으로 말아쥔다. 아프진, 않습니다. 답지않게 띄엄띄엄 말을 내뱉자 키리미치는 타인의 시선을 개의치도 않고 아마시로에게 다가온다. 그의 팔을 잡고서, 아마시로를 올려본다. 많이 아프면 약을 가져와 줄까? 아마시로는 키리미치의 저 상냥함이 원망스러울 때가 있었다. 차라리 당신이 못 되어 먹은 사람이었다면 어땠을까. 일부러 날 골리고 싶어 실수하고 잘못을 저지르는 영악하고 못 된 사람이었더라면. 죄책감 하나 느끼지 못하고, 얇게 저민 날고기를 상처에 얹어주지 않는 사람이었더라면. 나는 이렇게 당신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있었을 텐데. 고개가 서서히 아래로 내려간다.
“도련님.”
“응.”
“토오루 님.”
“으응, 왜 그래. 사다시.”
“토오루 님은 이 저택의 밖에서 살아갈 수 있으실 거 같나요.”
키리미치의 손에 힘이 살짝 들어간다. 그리 강하지 않은 악력은 키리미치의 삶을 증명해주는 듯했다. 궂은일을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고, 직접 힘을 써본 적도 없는…… 연약하고, 무르고, 유한 그런 삶. 그것은 키리미치와 무척이나 잘 어울렸지만, 이 저택의 밖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이 집안이 망하면 주인어른의 유일한 자식인 토오루 님이 곤혹스러워지시겠죠. 아마시로는 이 순간에도 진실만을 입에 담는다. 그는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키리미치와 눈을 맞춘다. 키리미치는 아마시로의 말을 듣고 벙쪘다. 그러더니 입술을 오물댄다. 말을 고르려는 듯 눈동자를 옆으로 굴리다가, 엉성하기 짝이 없는 미소를 입에 머금는다.
“나가본 적이 적어서, 잘 모르겠어. 사실.”
키리미치의 삶은 곱게 수놓아진 비단과 같다. 아름답고, 화려하고 동시에 사치스럽지만, 실속이 없다. 쉬이 더러워지고 어디에 걸리기라도 하면 찢긴다. 겉보기엔 아름답기 짝이 없는 그의 삶은 자세히 들여다보면 타인의 희생 없이는 유지될 수 없는 것이다. 아마시로는 그 엉성한 미소를 보고 깨달았다. 키리미치는 이 저택을 나가면 살아남을 수 없다. 아마 쓸쓸히 죽어갈 것이다. 배를 곯을 것이고, 잠도 자지 못 할 것이다. 추위에 떨거나 더위에 고통스러워할 게 분명했다. 키리미치는 타인 없이 살아갈 수 없다. 키리미치는, 토오루는, 아마시로의 도련님은…… 밖에서만큼은 아마시로 없이 살아갈 수 없을 거다. 무어라 말하는 게 좋을까. 어떻게 행동하는 게 좋을까. 주제넘진 않았을까. 아니, 이미 한참 주제넘었다. 몸종은 이런 것을 물으면 안 되는데. 이렇게 도련님을 불러대면 안 되는데.
“죄송합니다.”
뒤늦게 뱉어낸 사과에 키리미치는 난색을 표한다. 그런 말 하지 마, 괜찮아. 키리미치의 손이 아마시로의 등에 얹어진다. 그는 넓은 등을 느리게 쓸어내린다. 아마시로는 키리미치가 이리 굴 때면 묻고 싶은 게 너무나 많았다. 이를테면 당신은 토오코 씨에게도 이리 다정히 구는지. 이 다정함과 상냥함은 오로지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인지. 아니. 그 다정함이 당신의 천성인 것은 알고 있지만, 혹시 나에게만 유독 그런 건지. 만약 그렇다면 이유가 뭔지. 그때그때 생겨나는 의문은 많았고, 내뱉고 싶은 것 또한 수없이 존재했지만, 아마시로는 그것을 물어볼 수 없다. 그것은 선을 넘는 행동이다. 아슬아슬하게 지키고 있던 얄팍하고 흐릿한 선을 완전히 넘어가는 것에 가까웠기에 아마시로는 입을 꾹 닫을 수밖에 없었다. 바람이 불어온다. 바람이 조금 차다. 건조하기도 했다. 천 틈새로 파고든 바람은 피부의 온기를 훑어내더니 곧 그것을 앗아간다.
“……날이 춥군요.”
이러고 있으면, 정말 열병에 걸릴지도 모릅니다. 아마시로는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 키리미치의 어깨에 걸쳐주었다. 얇은 천 하나로 만들어진 옷을 걸친 아마시로를 보며 키리미치는 무어라 말하려다가 관둔다. 아마시로의 겉옷을 매만지다가 입을 떼어낸다. 고마워. 사다시. 덕분에 조금 따뜻해진 거 같아. 아마시로의 겉옷에 뺨을 비벼댄다. 저 고운 피부가 거친 천에 비벼져 혹여나 생채기라도 생길까 마음을 졸이는 것은 오로지 아마시로의 몫이었다. 그는 속에 품은 걱정을 입 밖으로 내는 대신에 둥근 어깨를 타고 흘러내린 겉옷을 고쳐 입혀준다. 숨을 내뱉을 때면 뽀얀 입김이 피어오른다. 오늘 밤에는 방에서 나오시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아마시로가 말하자, 키리미치는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아마시로는 알고 있다. 키리미치는 새벽이 되면 방에서 나와 날고기를 가지러 가기 위해 주방으로 갈 거라는 걸. 벽장의 문을 열고 옷을 걷어내어 피딱지가 앉은 다리에 날고기를 얹어줄 거라는 걸. 그 서늘함과 미약하게 나는 비린내, 대비되게 따뜻한 키리미치의 손에 아마시로는 그날 새벽 잠을 이루지 못하게 될 거라는 것까지. 아마시로는 그가 겪은 것 중 가장 유약하고 다정한 것을 내려본다. 난 당신을 어떻게 하고 싶은 걸까.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밖에 내어두면 금방 망가질 거 같은 당신을, 내가…….
생각을 의도적으로 끊어낸다. 불어오는 바람에 잘 정돈되지 못한 머리카락이 나풀댄다. 발갛게 달아오른 키리미치의 콧잔등을 보고 있자니 마음 한구석이 아마시로가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감정으로 들어찬다. 한없이 낯설었다. 낯설었기에 그것에 잠식되지 않고 완벽하게 잊어내고 싶었다. 들어가는 게 좋겠어요. 나지막이 뱉어낸 말에 키리미치는 그렇게 하는 게 좋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곧 등을 돌린다. 발을 앞으로 내디딘다. 아마시로는 키리미치가 그에게서 두 걸음 멀어졌을 때쯤에야 걸음을 옮긴다.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소리가 났다. 멀찍이서 사용인들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드문드문 걸려있는 그림이 망막에 맺힌다. 그것은 하루에 몇 번씩이나 보아도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풍경이었다.
❁
“아무래도 널 계속 고용하는 게 힘들 듯하다.”
신년새해. 행복과 일 년의 시작에 대한 기대로 가득해야 할 때, 아마시로는 키리미치 가문의 주인어른 앞에 앉아있다. 여기로 불려 온 것은 그가 이 저택에 들어온 이후로 처음이었다. 손을 가지런히 모아 무릎을 꿇고 앉은 채로 주인어른의 다리에 시선을 둔다. 이번 달까지 있으면 될까요. 아마시로의 물음에 남자는 고민하는 척하더니 입을 뗀다.
“다음 주엔 나가주었으면 좋겠는데.”
“네. 알겠습니다.”
“그간 일해준 삯은 나갈 때 주도록 하마.”
“감사드립니다. 나가보아도 될까요.”
“그래. 나가는 동안은 토오루와 붙어있지 않아도 좋다. 너도 이곳에서 지낸 세월이 있으니, 정리할 게 많겠지.”
안타깝게도 아마시로는 정리할 짐이랄 게 없었다. 그에게 있는 거라곤 시간이 지나 자연스럽게 마련하게 된 몇 벌의 옷과 그간 모아둔 돈밖에 없다. 그러나 아마시로는 제게 주어진 시간을 거절할 생각이 없었기에 고개를 조아리며 마음에도 없는 가식적인 감사를 보인다. 주인어른은 그게 만족했는지 입술 끄트머리를 위로 올려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가봐도 좋다. 축객령에 가까운 말에 아마시로는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섰다. 잔뜩 구김이 진 옷은 주인어른의 방에서 나온 뒤에야 정돈한다. 이 집의 몰락은 아마시로의 예상보다 훨씬 빨리 찾아왔다. 하기야,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주인어른은 집안의 가세가 기울어도 서양의 예술품을 사들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더 나아가 찻잎이나 향신료처럼 금보다 비싼 것들을 사치를 위해 사들이니 어떻게 기세가 안 기울 수 있을까. 키리미치는 그가 사용하는 쪽방으로 간다. 다 낡아빠진 가방을 꺼내어 옷을 하나씩 넣다가, 많은 걸 떠올린다. 이를테면, 다음 주. 이 집을 떠나야 할 때. 그리고 챙겨갈 짐. 자신이 사라진 자리에 남을 것들. ……키리미치, 토오루.
“도련님은 어떻게 되는 거지.”
키리미치 토오루. 그 이름을 떠올리니 아마시로가 알고 있는 많은 유약하고 반짝이는 것들이 생각난다. 봄철에 피어난 벚꽃잎. 여름바람에 흔들리는 풍경. 호수의 수면. 고목 위에 내려앉은 겨울의 첫눈……. 반짝이되 유약하고, 아름답되 금방 사라질 것 같은 걸 떠올린다. 말하는 게 좋을까. 그게 아니면, 조용히 떠나는 게 좋을까. 아마시로는 습관처럼 어떤 것이 가장 효율적이고, 어떤 것이 가장 올바른 방법일지 판단한다. 곧 천에 닿아있던 손이 아래로 툭 떨어진다. 다다미 바닥에 쓸린 손등이 간지럽다. 얕은 숨을 내뱉는다. 키리미치의 미소가 눈가에 아른거리는 듯하다. 눈을 질끈 감는다. 아마시로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어쩌면 그 흔한 마지막을 맞이하기 위해 이별의 말과 함께 작별을 고하고 떠나는 것도 선을 넘는 행동일지도 모른다.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하면 좋을까. 반쯤 열린 장지문 너머로 시선을 둘 때, 바닥에 그림자가 내려앉는다.
“사다시.”
“도련님?”
“응. 나야.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해.”
“아닙니다. 근데, 여긴 좀 추울 텐데.”
“괜찮아.”
“열병이라도 앓으시면 어쩌려고요.”
“괜찮다니까.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몸이 약하진 않아.”
“……그러면 다행이지만요. 외람되지만, 찾아오신 이유가?”
“그게, 우연히 들었는데.”
키리미치는 답지 않게 말을 고른다. 아마시로는 그가 할 말을 알 것만 같았다. 키리미치가 아마시로의 맞은편에 앉는다. 그의 다리가 다다미 바닥에 닿았을 때, 아마시로는 바닥이 너무 차게 느껴지지 않을지 걱정하였다. 그의 걱정처럼 키리미치는 몸을 움츠렸다가도 허리를 꼿꼿이 펴고 앉는다.
“그만둔다며.”
“무슨 말씀이신지.”
“다음 주에 나간다고 그러던데, 사용인들이.”
“아, 네. 맞습니다. 주인어른께서 그리 명하셔서요.”
“정말 가?”
“정말 가야지요.”
“정말로?”
“주인 어르신의 명이시니까요.”
키리미치의 표정은 마치 꼭, 길을 잃은 아이의 것과 같았다. 그는 손을 뻗으려다가도 다시 무릎 위에 얹기를 반복한다. 아마시로는 그 과정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꼭 가야 해? 키리미치의 목소리 끄트머리가 살짝 갈라져 있다. 그의 손이 잘게 떨린다. 생각해보면 키리미치는 첫 이별을 맞이하는 것이다. 키리미치 가문은 본래 폐쇄적인 곳으로 사용인을 잘 구하지 않았고, 사용인이 잘 관두지도 않는 곳이었기에 아마시로는 의도치 않게 키리미치의 곁을 떠나는 첫 번째 사람이 되어버렸다. 죄책감은 없었다. 본래 만남과 이별은 갑작스레 찾아오는 것이었으니까.
“도련님의 곁에 끝까지 있어 드리지 못해 죄송할 뿐입니다.”
아마시로가 고개를 조아린다. 키리미치는 처음으로 아마시로에게 고개를 들라 명하지 않았다. 대신에 입술을 씹어댔다. 손가락을 안으로 말아쥐면 값비싼 비단에 자글자글한 선이 생긴다. 아마시로가 내뱉은 이별의 말에 키리미치는 어떤 대답도 하지 않는다. 자리에서 일어나 도망치듯 그의 방으로 떠났다. 홀로 남겨진 아마시로는 발소리가 멀어져 들리지 않을 때쯤이 되어서야 고개를 들었다. 키리미치가 도망치듯 떠나간 자리에는 그의 방에 피워두는 향의 냄새만이 남아있다. 아마시로는 자리에서 일어나 장지문을 닫는다. 거센 바람이 얇은 종이에 닿을 때마다 작은 소리가 났다. 사람이 만들어내는 소음이 하나도 없는 방 안에서 아마시로는 마저 짐을 싸기 시작했다. 애매하긴 하나 이별을 고했고, 이제 아마시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하나도 없다. 그는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끝냈다. 떠나갈 준비만 하면 되었다. 그럴 텐데. 분명히 그러기만 하면 될 텐데.
아마시로는 그가 직접 닫은 장지문을 바라본다. 키리미치가 신경 쓰여 어쩔 수가 없었다. 이 집에 정붙일 사람 하나 없이 홀로 남겨질 키리미치가 걱정되었다. 그러나 아마시로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 이제 그에게 주어진 일은 이 집을 떠날 준비를 하는 것뿐이었다. 그건 키리미치를 찾아갈 마땅한 이유가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몸종이 먼저 도련님을 찾아가는 것은 목이 베여도 할 말이 없는 행동이지 않은가. 손이 점차 느려진다. 차라리 매질 당하는 일을 며칠 더 하겠다고 자처할 걸 그랬나. 아니, 애초에 이제 매질 당할 일도 없겠지. 쿄우 님과 미츠코 님도 이 저택에 발을 끊으신 지 어언 한 달이 더 되었으니까. 모든 것이 끝을 맞이하고 있다. 이 모든 게 끝을 향해가고 있다. 키리미치도 이 끝을 직감했을까? 예상이나 하고 있었을까? 막연하게 그의 마지막에는 아마시로가 함께할 게 분명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을까? 의도적으로 생각을 끊어내고자 손을 바삐 움직인다. 챙길 것도 없으면서 괜히 주위를 둘러보았고, 그간 모아두었던 돈을 하나씩 세기도 했다. 한참 그러고 있던 아마시로는 얼마 되지도 않던 짐을 다 싼 뒤, 천을 싸맸다. 그리고 아마시로는 그 자리에 몸을 누였다.
눈을 감는다. 빛이 고이던 망막을 질기고 얇은 피부가 가리며 어둠이 내려앉는다. 눈을 감고 있을 때면 축축하고 차던 날고기의 촉감이 떠오른다. 그것을 한 장, 한 장 피부에 올려주던 손. 이따금 스칠 때면 느껴지던 간질거림과 미적지근한 온기. 이 저택을 나가 다른 곳에서, 어쩌면 아마시로 조차 가본 적 없고 아예 알지 못하는 낯선 타지에서 살게 되었을 때…… 키리미치가 안겨주던 그 모든 것들을 잊어낼 수 있을까? 몸을 뒤척인다. 아직 상처가 다 낫지 않아 통증이 내려앉은 다리가 비벼질 때면 아마시로는 습관처럼 키리미치를 떠올린다. 잊어야 한다. 이제는 잊어내야 한다. 아마시로가 그에게 해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불우하기 짝이 없는 삶을 살아가기에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자신과 함께하는 것보다 그래도, 가족과 함께 있는 것이 키리미치에게 나은 선택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왜냐하면, 그렇게 믿고 싶었으니까. 그리 생각하지 않으면 일평생 그 온기와 감각을 잊어낼 수 없을 것만 같아서…… 키리미치의 손길이 닿던 새벽을 떠올리게 될 거 같았기에 아마시로는 키리미치가 괜찮을 거라고, 괜찮아야만 한다고 계속해서 되새김질했다.
느지막한 밤, 아마시로는 누군가의 손길에 의해 색 짙은 잠에서 끌어올려졌다. 일어나, 사다시. 일어나 봐. 흔들리는 몸. 흐릿한 의식 속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 아마시로는 겨우 눈을 뜨고 상체를 일으킨다. 찡그려진 미간을 가리기 위해 마른세수를 연거푸 한다. 고개를 들어 옆을 보았을 때, 거기에는 키리미치가 있었다. 평소보다 가볍게 입은 옷과 옆에 놓인 짐보따리. 엉성하게 묶인 천 사이로 언뜻 반짝이는 보석이나 패물 따위가 보였다. 토오루 님? 아마시로가 키리미치를 부르자 그는 고개를 끄덕인다. 응. 토오루야. 키리미치의 표정은 어딘가 결연하기까지 하다. 아마시로는 그가 왜 자신의 방으로 찾아왔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오늘 그는 매질을 당하지도 않았고, 상처가 터지지도 않았는데. 더군다나 키리미치는 얇게 저민 고기가 담긴 그릇도 들고 오지 않은 채였다.
“혹 제게 볼일이라고 있으신 가요.”
“볼일은 아니구…….”
“네.”
“부탁이 있어서.”
“부탁이요?”
불안이 그를 잠식한다. 그 불안에 집어 삼켜지고 싶지 않아서 아마시로는 키리미치에게 보이지 않게 이불을 꽉 감싸 쥐었다. 쪽방 안에는 섬세하게 짜인 촘촘한 정적을 갈라내는 숨소리가 존재한다. 키리미치와 아마시로가 만들어내는 숨소리는 무척이나 불규칙적이었고, 그 아래에는 기대와 그것을 가려내는 색 옅은 불안이 깔려있다. 어떤, 부탁인지 여쭈어봐도 될지요. 아마시로의 말에 키리미치는 한참 말을 고른다. 입을 벌렸다가, 닫는다. 입술만 한참 달싹이던 키리미치는 그보다 지위가 낮은 아마시로에게 고개를 숙인다.
“토오루 님. 제게 고개를 숙이시면 안 됩니다.”
“사다시.”
“토오루 님, 제발 고개를 드세요.”
“부탁할게.”
“대체 어떤 걸 부탁하시려기에 이러시는 건가요.”
제게 얼마 있지도 않은 돈을 받고 싶으신 건가요. 아니면 제가 이 집안에 끝까지 남아있길 바라시는 건가요. 그것도 아니라면, 제 모든 것이 도련님의 것이 되길 바라시는 건가요? 아마시로의 말이 길어질수록 키리미치의 안색이 파리하게 질려간다. 그런 거, 그런 건 아니야. 아닌데,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그게, 그게 있잖아……. 띄엄띄엄 말을 내뱉는 모습이 어딘가 애처롭다. 그렇기에 아마시로는 키리미치의 입을 손으로 막고 싶었다. 그가 내뱉는 말을 끝까지 듣는다면 아마시로는 그가 바랐던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할지도 모른다. 예수니, 하나님이니 하는 신을 믿어 박해당한 신자의 모습이 떠오른다. 영주의 딸을 사랑한 소작농의 목을 베던 사무라이의 발치에 앉아있는 듯한 기분이다.
“나랑 같이 가줘.”
“……네?”
“네가 갈 때, 나도…… 데리고 가줘.”
키리미치는 저택의 밖이 어떤 곳인지 알고 있기나 할까? 저택 밖으로 나가본 적도 없으면서. 저택 밖의 사람을 겪어본 적도 없으면서. 아마시로는 제게 저런 부탁을 하는 키리미치를 이해할 수 없다. 그렇기에 그의 눈동자를 유심히 바라본다. 그런다고 한들 키리미치의 생각을 알 수 있을 리가 없는데. 그렇게 눈을 맞추고 있으면 아주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서……. 키리미치는 아마시로와 시선을 맞추고 있다. 눈을 피하지도 않고, 다시금 입을 떼어낸다. 같이 나가자. 부탁이야. 그러더니 곧 황급히 보따리를 아마시로에게 내민다.
“이거 다 팔면 그래도 작은 마을에서 정착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 강도가 들겠지요.”
“어, 그러면 수도로 가서…….”
“살아가는 게 힘든 자들은 어디에나 있지 않나요. 이 무거운 것들을 다 짊어지고 다니면 잠도 자지 못할 겁니다.”
“……이건 쓸모가 없어?”
“쓸모가 없는 건 아니지만, 거추장스럽지 않은 건 또 아니죠.”
“이거 전부 사다시가 가져도 돼.”
“저는 괜찮습니다. 도련님.”
“그렇게 차갑게 말하지 말아 줘. 나는, 난 사다시랑 같이 가고 싶어.”
“주인어른이 싫으신가요?”
“아버지가 싫은 건 아니야.”
“그러면 주인마님이 미우신가요?”
“어머니를 여전히 사랑하고 있어.”
“그런데 왜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천한 몸종과 함께 떠나겠다고 말하시는 건가요. 도련님.”
저택 밖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막연히 아름답지 않을 텐데. 그리 자유롭지도 못한 곳인데. 가세가 기운다고 한들 이곳에 있는 편이 키리미치에겐 훨씬 좋을 것이다. 지금보다 유복하진 않아도, 괜찮은 집안의 양자로 들어갈 수도 있지 않은가. 아마시로의 말에 키리미치는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미간을 찡그렸다. 나도 알아. 이상한 거, 알아. 키리미치가 아마시로에게 다가온다. 하늘색의 머리카락이 장지문에 투과된 달빛을 받아 미약하게 반짝인다. 키리미치의 눈동자 속에는 아마시로가 있다. 아마시로는 퍽 곤란한 표정으로 키리미치를 바라보고 있다가, 표정을 눈에 담자 황급히 시선을 아래에 둔다.
“내가 싫어?”
“그런 건 아닙니다.”
“그러면, 내가 미워?”
“그럴 리가요.”
“그런데 왜 안 된다고 해?”
“저 같은 거랑 있는 것보다 여기에 있는 편이 나을 테니까요.”
“나는 사다시랑 가고 싶어.”
“저는 아무것도 해드릴 수가 없습니다.”
“아무것도 해주지 않아도 돼.”
물막이 맺힌 망막을 계속 보고 싶지 않았다. 모진 말을 내뱉지 못할 것 같아서 아마시로는 아랫입술을 흰 이로 짓누른다. 저와 도련님의 관계는 이 저택, 주인어른의 아들과 그의 몸종일 뿐입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되지 못해요. 그의 말에 키리미치는 고개를 떨군다. 알고 있던 사실을 다시금 자각하게 된다는 건, 더 나아가 아끼는 존재에 의해서 자각하게 된다는 건, 키리미치의 예상보다 마음이 저린 일이었다.
“그게 전부야?”
“네. 그게 전부입니다.”
“나는 사다시를 정말 내 친구처럼, 생각하고 있었어.”
“친구가 대신 매질을 당해주는 존재는 아니지 않나요.”
마음에도 없는 모진 말은 아마시로의 성대를 긁어댄다. 혹여나 이 말에 키리미치가 상처받진 않았을까. 아니, 차라리 상처받는 게 낫다. 그러면 얄팍한 정을 떼어내고서 이곳에 남을 테니까. 아마시로가 이전처럼 유하게 대하지 않자 키리미치는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한참 말없이 있던 그 유약한 것은 손을 뻗어 아마시로의 손등 위에 얹는다. 키리미치의 손은 아마시로의 것과 달리 부드럽고, 따뜻했으며, 어딘가 무르다. 맞닿은 피부가 조금 뜨거웠다. 간지럽기도 했다. 혹여나 키리미치의 손에 상처라도 생길까 아마시로는 손을 움직이지 못했다. 키리미치의 손가락이 아마시로의 손등을 간질인다.
“같이 있고 싶어.”
“어째서인가요?”
해소되지 않은 의문이 그의 속에 떠다닌다. 이해할 수 없다. 납득 할 수도 없다. 그렇기에 아마시로는 다시금 묻는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여쭙고 싶습니다. 그의 말에 키리미치의 뺨이 발갛게 달아오른다. 그러니까, 그게……. 키리미치는 쉬이 말을 꺼내지 못한다. 귓등까지 벌게진 것이 마치, 꼭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보인다.
“있지. 사다시.”
“네. 토오루 님.”
“웃지 않을 거야?”
“제가 웃을 수 있는 위치는 아닙니다.”
“속으로라도 비웃지 않을 거야?”
“토오루 님을 제가 비웃을 리가요.”
“그러면 말할게.”
“네. 편히 말씀해주세요.”
“……좋아해서.”
“네?”
“내가, 사다시를 좋아해서 같이 가고 싶은 거야.”
수줍게 웃는 키리미치는 누가 봐도 경국일색의 그것이다. 미소를 보고 아마시로는 답지 않게 입을 살짝 벌린 채로 멍하니 앉아 있었다. 남색을 꺼리는 것은 아니다. 귀족가의 수발을 들며 남색을 즐기는 이들을 몇 봐왔었다. 거부감은 없다. 다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부족한 것 하나 없이 자라온 키리미치가 왜 부족하기 짝이 없는 자신을 좋아하는 걸까. 그럴 이유는 단 하나도 없다. 적어도 아마시로는 그렇게 생각한다. 외모가 빼어난 것도 아니고, 성격이 다정한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유독 배려심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는 자신이 키리미치에 비해서 한참은 모자란 사람이라 생각한다. 실제로도 그렇지 않은가. 아마시로의 고개가 서서히 아래로 내려간다.
“대체…… 왜?”
“어?”
“도련님씩이나 되는 분께서 절 왜 좋아하시는 건지, 저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네가 왜?”
“저는 많은 것이 부족하기 짝이 없으며, 당신의 몸종에 불과하지 않나요.”
아마시로의 말을 키리미치는 꽤 오랜 시간 곱씹었다. 나도 많은 것이 부족하여 완벽하지 못한데 그게 뭐가 어때서. 떠오르는 생각을 바로 입밖에 내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했다. 튀어나오려는 말들이 아마시로에겐 상처가 될지도 모른다. 키리미치는 유순하긴 했으나 멍청하진 않았다. 즉, 아마시로와 그 자신의 차이점을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입술을 달싹인다. 연정이 모든 것의 해결법이 되지는 못하지만, 그에 이유는 필요 없을 거라고 믿었다. 본래 사랑이란 게 명확한 이유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키리미치의 사랑이 그랬으니까. 처음에는 안타까웠고, 성년을 맞이하기 전에는 미련해 보였다. 그 미련해 보이는 모습이 애처롭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계속 시선이 가는…… 키리미치의 사랑은 인간이기에 가질 수 있는 측은지심과 다소 천박한 생각에서 시작되었다. 깨끗하지 못한 감정이다. 어쩌면 키리미치는 그래서 사랑의 이유를 붙이지 않으려고 한 걸지도 모른다.
“이유가 꼭 필요해?”
“필요합니다.”
“어째서?”
“이해하고 싶으니까요.”
“이유는 말 못 하겠어. 떳떳하진 않아서.”
“그런가요.”
“그렇다고 해서 널 좋아한다고 한 게, 거짓말은 아니야.”
아마시로가 다음 주가 되면 떠난다는 말을 들었을 때, 키리미치는 그와 함께 이 저택을 나가는 상상을 해보았다. 소설에서나 읽던 산이나, 바다. 아사쿠사와 같은 시내. 사람이 잘 살지 않는 마을. 일본 내의 전역을 떠돌았다. 상상 속의 아마시로와 키리미치는 함께 바다를 보았다. 푸르른 수면은 생선 비늘처럼 반짝였었다. 현실이 상상처럼 아름답진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지만, 아마시로와 함께라면 뭐든 좋을 거 같았다. 막연하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키리미치는 아마시로의 손을 잡는다. 손가락 사이에 손가락을 끼워 넣는다. 아마시로의 손이 오늘따라 유독 차가웠다.
“너랑 같이 있고 싶어. 나는 나를 키워준 아버지도, 나를 낳아준 어머니도 아닌 내 곁에 항상 있어준 너랑 함께하고 싶어.”
억세지 않은 손길과 그리 강하지 않은 힘이었음에도 키리미치의 손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아마시로는 키리미치의 말을 몇 번이나 곱씹는다. 그의 아비도, 어미도 아닌 완벽한 타인인 나와 함께하고 싶다고? 감성보단 이성을 중시하는 아마시로는 키리미치의 사랑을 일평생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기에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어딘가 깨끗하고 숭고하기까지 한 감정을 감히 삼키고 싶었다. 모순되기 짝이 없는 마음에 아마시로는 자기 자신에게 처음으로 혐오감을 느낀다.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뱉는다. 차가운 공기가 폐부 깊숙한 곳을 훑어내고 빠져나간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생각이 얽히고설켜 정신없이 꼬여있다. 그러나 아마시로는 여전히 제 주제를 너무나 잘 아는 인간이었기에 작금의 상황에 대한 해답을 알고 있다. 거절해야 한다. 거절해야만 한다. 저런 사랑을 받기에 아마시로는 너무나 부족한 인간이었고, 키리미치에게 어울리지도 않는 사람이었다. 키리미치는 키리미치 토오루라는 사람은, 아마시로의 도련님은, 그에겐…… 조금 더 다정한 사람이 어울렸다. 자신 같은 사람은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거절하는 것이 도리다. 그의 사랑을 식도 뒤로 삼킨다면 자신을 거둬준 주인어른을 볼 면목이 없게 되어버린다.
“저는 토오루 님과 어울리지 않는 사람입니다.”
생각과 달리 튀어나온 말은 완곡한 거절의 의사가 아니었다. 아마시로는 제 말에 놀라 황급히 입을 소매로 가린다. 이것은 키리미치의 옆에서 배운 버릇과도 같다. 그의 반응에 키리미치는 눈을 감았다가 뜬다. 아마시로의 손을 완전히 감싸 잡는다.
“사다시는 다정해.”
“……제가요?”
“이렇게 나랑 있어주잖아.”
키리미치가 아마시로에게 다가간다. 그리고 이마를 맞댄다. 마치 열이 나는 아이의 체온을 확인하듯이. 사랑하는 사람과 마주보고 싶다는 듯이. 입을 맞추는 연인처럼……. 아마시로는 난생처음으로 낯이 화끈거린다는 말이 어울리는 감각을 느꼈다. 입술을 달싹인다. 저는 당신 생각보다 좋은 사람이 되지 못해요. 힘없이 그리고 나약하게 내뱉은 말에 키리미치는 언제나 그렇듯 유순하게 웃는다. 휘어진 눈매 사이로 회색과 검은색이 사그라든다. 달빛이 맺힌 눈동자는 언제나처럼 아름답다.
“네가 좋아.”
미츠코는 키리미치의 수많은 단점 중 하나가 너무나 솔직하다는 것이라 말했다. 아마시로는 그 말에 공감하면서도, 동시에 키리미치의 수많은 장점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나랑 있어 줘, 사다시.”
키리미치는 왜 나를 좋아하는 걸까. 나 같은 사람을 어째서 사랑하게 된 걸까. 아마시로는 속으로 한탄한다. 아, 불쌍한 우리 도련님. 불쌍하기 짝이 없는 도련님. 스스로 평탄할 수 있는 팔자를 꼰다는 것이 안타깝고 불쌍하기 짝이 없다. 그렇지만, 아마시로는 그것에 감사해야만 한다. 키리미치가 스스로의 삶에 안주하지 않았기에 그를 사랑하는 것이었고, 그와 함께 있고 싶다고 고백한 것이었으니 몇 번이나 머리를 조아려도 부족하기 그지없다. 아마시로는 마지막 기회를 주겠다는 듯 입을 연다. 저는 분명 당신이 상상 속에서 그려냈을 법한 좋은 연인은 되어드리진 못할 겁니다. 그러자 키리미치는 아무도 없는 방에서, 오로지 아마시로만 들으라는 듯이 어쩌면 아마시로만 들었으면 좋겠다는 듯이 속삭인다.
“괜찮아. 내 상상 속에 연인은 언제나 사다시였는걸!”
말 뒤에 따라붙는 작은 웃음소리. 손등에 내려앉아 이제는 하나가 되어버린 미적지근한 체온. 그 모든 것들을 아마시로는 견딜 수 없었고, 도저히 견디지 못할 듯하여 결국 키리미치를 품에 안았다. 키리미치에게선 옅은 향내음이 났다. 일주일 뒤에는 못 맞게 될 그 향을 앗아가지 말라는 듯 팔에 힘을 준 채로 키리미치의 귓등에 입술을 가까이한다. 함께 나갈까요. 어디로 갈까요. 당신은 바다에 가본 적이 없고, 나도 바다에 가본 적이 없으니 우리…… 바다로 가도록 할까요. 아무도 저희를 찾지 못하도록요. 생각해보니 그곳은 우리에게 특별한 장소가 되겠군요. 바다. 그래요. 바다가 좋겠습니다. 우리, 바다에 갑시다. 도련님. 토오루 님. ……토오루. 함께, 둘이서 푸르르고 드넓은 바다에 갑시다. 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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