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20

Huntington

휘트니 x 바닐라

 

 

 

 

 

 

 

 

 

 

 

 

 

 

 

 

 

휘트니에게 남동생이 생겼다. 그의 부모가 몸을 섞어 숭고한 사랑의 결과물을 만들어냈다는 뜻은 아니다. 정말로, 갑자기, 하루아침에 남동생이 생겼다는 뜻이다. 그는 앞에 서 있는 늙은 집사와 계집인지 남자인지 모를 것을 바라본다. 도련님. 휘트니 도련님. 마음에 안 드실 건 알지만, 그…… 이분은 바닐라라고 하고요. 그게, 사실, 주인어른의……. 집사는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휘트니가 말을 끊어낸 것은 아니었다. 단순히 착잡함에 차마 계속 말을 이어 나가기가 힘들어서 결국에 입을 닫아버린 게 분명했다. 휘트니는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고서 바닐라에게 시선을 둔 채로 느리게 입을 떼어냈다.

“맨날 고상하게 굴던 양반이 사고를 거하게 친 모양이야. 그렇지?”

“그으, 주인어른의 혼외자식이긴 하나…….”

“야. 너 이름이 바닐라라고?”

바닐라는 휘트니의 물음에 눈동자를 옆으로 굴린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죄책감이나 불안보다는 이 상황이 번거롭게 느껴졌기에 일이 더 귀찮게 흘러가지 않을 만한 방법을 떠올리려는 것처럼 보였다. 적어도 휘트니의 눈에는 그랬다. 휘트니는 그게 참으로 고까웠다. 같잖아 보였고, 평탄하다면 평탄하던 일상에 끼어든 불순물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불쾌하게 느껴졌다. 휘트니의 발이 앞으로 나아간다. 이제 나이가 들어 노쇠한 집사는 휘트니를 단호히 말리지 못하고 중간에 끼어 눈치만 보고 있다. 바닐라는 집사가 휘트니를 제지하지 않자, 결국 그에게로 시선을 두었다.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보며 느리게 입을 떼어낸다. 응. 바닐라인데. 짤막한 말에 휘트니는 코웃음을 터트린다. 그 무엇도 제 애비를 닮지 않은 놈이 뻔뻔함만큼은 물려받은 듯했다.

“그 양반 힘도 좋으셔. 씹 뜨겠다고 어디까지 갔던 거야, 대체.”

“휘트니 도련님. 그, 언행을 조금.”

“지금 야마가 안 돌게 생겼어? 응?”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래도 처음 만나신 거니 표정도 좀 푸시고…….”

집사가 식은땀을 흘리며 휘트니를 달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그 노력은 휘트니에게 닿지는 못했다. 미간을 잔뜩 찡그린 채로 갑자기 가족이라 한데 묶이게 된 존재를 내려본다. 바닐라의 낯은 평온하기만 하다. 자기 혼자 마냥 평온하고, 평화로우며, 어떠한 일도 겪지 않았다는 듯 미세한 변화도 보이지 않는다.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짜증스럽게 미간을 찡그리고 있는 자신과는 다른 모습에 불쾌한 걸지도 모르겠다. 휘트니는 굳이 제 감정에 정의를 내리지 않았다. 그는 그렇게까지 침착한 사람이 못 되었고, 더 나아가 불쾌한 것을 인지했다고 한들 그것을 해소할 방법이 없었다. 이미 다 결정된 일이었다. 아비라는 남자가 예민하고 까탈스러운 제 어미를 어떻게 설득한 건지는 모르겠으나, 바닐라가 이 저택에 발을 들인 이상 저것이 저택에서 내쫓길 일은 없을 것이다. 진짜, 기분이 좆같은데 어떻게 해야 하지. 나지막이 내뱉은 말에 집사는 어색하게 웃으며 바닐라의 짐을 받아 든다. 바닐라 도련님, 이건 도련님의 방에 가져다 두도록 하겠습니다. 도련님의 방은 차에서 말씀드려 아시겠지만, 이 층의 가장 구석에 있어요. 거기는 해가 무척이나 잘 드는데……. 집사의 말에 바닐라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는 휘트니와 눈을 맞춘 채로 입술을 달싹인다.

“나도 기분 별로 안 좋아.”

“뭐?”

“너만 좆같은 줄 알아? 나도 좆같다고. 휘트니.”

바닐라의 말에 집사의 안색이 파리하게 질린다. 휘트니는 헛웃음을 터트리며 때릴 것처럼 바닐라에게 한 걸음 다가간다. 바닐라는 그를 올려보며 코웃음 치더니 몸을 돌린다. 제멋대로 대화를 끝내는 듯한 행동에 어이가 없어 말이 쉽게 튀어나오지 않았다. 벌어진 입술로 새어 나오는 말이라곤 저열한 욕설뿐이었다. 저택에서 꽤 오랜 기간 일한 데이지는 집사와 바닐라를 번갈아 보더니 휘트니에게 달려와 그를 달래기 시작한다. 도련님. 정원에 나가보시는 게 어떨까요. 그게 아니라면…… 음, 달콤한 코코아라도 마시시는 것도 좋을 거 같아요. 그렇게 서 있지 마시고요. 도련님, 네? 데이지의 말에도 휘트니는 바닐라가 계단을 올라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현관 쪽에 서서 그를 눈으로 좇고 있었다. 저 빌어먹을 새끼 계속 여기서 사는 거야? 어? 짜증스레 묻자 데이지는 겨우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네, 아마도 당분간은 여기에 머무실 듯해요. 주인어른께서 그렇게 하라고 하셔서요. 당분간이 아니라, 계속 지내게 되겠지. 휘트니는 제 아비를 떠올리며 혀를 찼다. 아까 피우던 담배를 다시 입에 물고 싶다는 욕망이 차오른다.

“어떻게 하시겠어요, 도련님?”

“뭘 어떻게 해. 내가 말해봤자, 들을 인간이야. 그 인간이?”

“그건, 그렇죠.”

“방으로 갈 테니까 중요한 일 아니면 부르지 마. 그리고 저 바닐라인지, 뭔지. 내 방 근처에 못 오게 해. 알겠어?”

“네. 올라가셔서 쉬세요.”

데이지는 휘트니를 향해 허리를 굽혀 인사한다. 휘트니는 데이지를 힐끗 보다가, 등을 돌려 바닐라가 올랐던 계단에 발을 올린다. 계단을 하나씩 오르며 그는 바닐라라는 사람을 몇 번이나 다시 떠올렸다.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불쾌하기 그지없었다. 휘트니는 저 완벽한 이방인을 이 저택 안에서 지워내고 싶었다. 계집처럼 입고 다니는 것도, 아무렇지 않게 저택 안으로 들어온 것도, 제 아비가 저것을 기어코 가족이란 형태와 울타리 내로 밀어 넣은 것도. 전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쩌면 이 모든 것에 휘트니의 의지가 아주 조금도 반영되지 않았다는 게 그의 자존심을 긁어댄 걸지도 모른다. 손가락을 안으로 말아쥔다. 길이가 마냥 짧지 않은 손톱이 손바닥의 피부를 짓누른다. 뭉툭한 통증이 피부 아래의 신경을 건드린다. 빌어먹을 새끼. 휘트니는 낮은 목소리로 거친 욕설을 읊조린다. 복도를 걸을 때마다 드문드문 걸려있는 액자가 거슬리기 짝이 없다. 계단을 반쯤 올랐을 때, 그는 걸음을 멈춘다. 현관에서 가장 잘 보이는 중앙계단 벽면에 걸려있던 액자가 사라져있었다. 저곳에는 새로운 그림이 걸리게 될 것이다. 단 한 번도 화가의 앞에 선 적 없으면서, 마치 화가의 앞에 서서 자세를 취하며 웃고 있는 가족의 그림이 걸릴 거다. 그 상상 하나만으로 휘트니의 미간이 좁아진다. 빌어먹을 새끼. 반쪽짜리더라도 피가 섞인 존재를 속으로 쉼 없이 깎아내린다. 그래야 이 기분이 풀릴 듯했다. 바닐라는 휘트니의 안에선 제 아비를 유혹한 창부와 같다. 몸이라도 대주고 이 저택에 들어온 모양이지. 걸레 같은 새끼. 입술 끄트머리가 위로 올라간다. 휘트니가 생각한 모든 것이 진실이 아닐지도 모른다. 아니, 진실이 아닐 게 분명했다. 그러나 그 생각은 휘트니의 안에서 진실로 존재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해야만 휘트니는 괜찮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새가 날아오른다. 휘트니는 총구를 하늘을 유영하는 새에게 두고서 방아쇠를 당긴다. 총알이 발포되며 나는 강한 소리 다음으로 정적이 이어진다. 총에 맞은 새는 정원 잔디 위로 툭 떨어진다. 휘트니는 연기가 피어나는 총구를 아래로 내리고서 죽은 새를 향해 걸어간다. 근래 기분이 좋지 않은 휘트니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사용인들은 손뼉을 치며 그의 사격 실력을 칭찬한다. 도련님의 사격 실력은 나날이 좋아지시는군요. 역시 도련님은……. 장황하게 길어지는 그들의 말을 휘트니는 가볍게 무시한다. 대신에 그는 바닥에 툭 떨어진 새의 다리를 잡아 들었다. 묽은 피가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고 있다. 이따금 불어오는 바람에 튄 피가 소맷자락에 묻어난다. 휘트니는 눈도 감지 못한 채로 죽은 새의 눈동자를 들여보다가 그것을 바닥에 내던진다. 그리고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고서 저택으로 시선을 돌린다. 그의 눈은 이 층의 구석진 방, 창문에 닿아있다. 커튼이 쳐진 탓에 안이 잘 보이지 않았다. 휘트니가 미동도 하지 않자, 집사는 그에게 다가와 묻는다.

“왜 그러십니까, 도련님?”

“쟤, 저거에 있는 거 맞긴 해?”

“맞습니다. 하실 말씀이 있으면 불러올까요?”

“됐어.”

휘트니의 눈이 새의 사체를 치우려는 하녀에게 닿는다. 그것은 저택의 유일한 장자였던 휘트니의 눈치를 살피며 손에 피가 묻는 걸 개의치도 않고 새를 잡는다. 야. 그거 가져가지 마. 내버려둬. 그의 말에 하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무어라 말하려고 한다. 미간이 좁아지자 눈치가 빠른 집사는 대신 입을 연다. 거기에 내버려둬라. 집사의 말에 그제야 눈치를 챈 듯 사체를 내려두고서 두어 걸음 물러난다. 손을 가지런히 모은다. 피부에 묻은 피가 흰 에이프런에 묻어난다. 상체를 숙여 바닥에 떨어진 것을 주워 든다. 그리고 창문을 바라보며 입술의 끄트머리를 올려 웃는다. 추잡한 욕망에서 비롯된 저열한 생각이 바닐라에게 닿는다. 힘을 주면 부러질 것 같은 조류의 다리를 잡은 채로 저택에 들어선다. 그 작은 몸에 고여있던 피가 후드득 떨어진다. 휘트니의 발이 닿은 곳에는 붉디붉은 피가 그가 머물렀다는 흔적처럼 남았다. 도련님. 어디 가십니까? 도련님? 집사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듯이 무시한다. 휘트니는 바닐라의 방을 향해 걷고 있다. 그는 값비싼 인도산 카펫에 피가 떨어지는 걸 개의치 않았다. 계단을 성큼성큼 오른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아무것도 안 걸려있던 벽면에는 마치 처음부터 존재했다는 듯 바닐라와 휘트니, 그리고 그들의 부모가 그려진 초상화가 걸려있다. 우스꽝스럽기 그지없었다. 휘트니는 실실 쪼개며 손을 흔들거리며 걷는다. 그의 행동은 휘트니가 듣는 도련님이라는 호칭과 달리 경박한 양아치와 다를 것이 없었다. 휘트니의 걸음은 바닐라의 방 앞에 다다른 뒤에야 멈췄다. 그는 새의 사체를 바닥에 툭 던져둔다.

“야. 바아닐라.”

능청스레 말을 늘여 그를 부른다. 바닐라는 대답이 없다. 쉬고 있는 건지, 자는 건지. 아니면 단순히 휘트니라는 존재를 무시하는 건지. 뭐가 됐든, 침묵을 지키는 그 행동은 휘트니의 기분을 망치기에 충분하다 못해 차고 넘쳤다. 그러나 휘트니는 문을 주먹으로 세게 내려치지 않았다. 대신에 발밑에 놓인 사체를 내려보았다. 나오면 보겠지. 계집처럼 생겨서, 정말 계집이라도 되는 것처럼 입고 다니는 바닐라는 너무나 유약해보였다. 그가 보인 뻔뻔함과 무던함은 그 외형에 파묻힌 지 오래다. 휘트니의 입술 끄트머리가 위로 올라간다. 이걸 보고 어떻게 반응할까. 상상만으로 유쾌했다.

그리고 며칠 뒤, 휘트니는 제 방 앞에서 미간을 잔뜩 찡그린 채로 문을 타고 아래로 흘러내리는 붉은 액체를 보게 되었다.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문의 위에는 가죽이 다 벗겨진 쥐가 거꾸로 매달려 있다. 휘트니는 이것을 누가 여기에 걸어두었는지 알 수밖에 없었다. 웃긴 년일세.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고, 삐딱하게 서서 웃는다. 얇은 쥐 꼬리를 엄지와 검지로 잡아 빼낸다. 축 처진 쥐의 사체에서 부패액과 피가 질질 흘러내리고 있다. 그것은 휘트니의 구두 위에 내리 떨어진다. 광이 반질반질 나던 구두에 묻어나는 오물을 휘트니는 개의치도 않았다. 대신 살이 통통하게 오른 쥐의 사체를 아래로 두고 흔들며 발을 옮겼다. 휘트니를 보며 상체를 숙여 인사하던 하녀들이 그가 손에 들고 있는 것을 보고 입을 벌린다. 단말마와 같은 비명을 내지르자 휘트니는 실실 쪼개며 복도 구석에 있는 방을 향해 걸었다. 빌어먹을 년이. 욕을 읊조리며 문 앞에 선다. 쥐의 사체를 문에 강하게 던지자 그 작고 썩은 것의 살점이 터진다. 구더기가 낀 내장과 부패액, 검은 피가 흘러내리며 악취가 났다.

“야. 너, 매일 방에만 처박혀서 있는 주제에 이런 건 또 언제 가져왔어?”

문을 향해 말하자 안에서 작은 소리가 났다. 그 소리는 문으로 점차 가까워진다. 형한테 이런 좆같은 선물, 가져다주면 안 되는 거 알기는 알아?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는 기름칠이 되지 않은 경첩이 벌어지며 나는 소리에 파묻혀 사라진다. 열린 문 틈새로 탁한 회색의 머리카락이 드러난다. 언뜻 보면 창백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흰 피부, 백색의 눈동자. 예쁘장하게 생긴 얼굴을 보고 휘트니는 저열한 욕망과 그것에서 비롯된 폭력성을 씹어 삼켜야 했다.

“뭐가.”

“내 방문에 저거 걸어둔 거, 너 아니야?”

휘트니가 으깨진 쥐를 고갯짓으로 가리킨다. 바닐라의 시선이 바닥으로 향한다. 어, 맞는데. 바닐라는 아주 당연히 할 일을 했다는 듯 태연하게 말한다. 그의 반응에 휘트니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뭐가 그렇게 당당해서 이 지랄이야? 휘트니는 사체의 파편을 짓밟으며 바닐라에게 다가간다. 그의 이마를 검지로 누르며 밀어댄다. 강한 힘에 바닐라의 몸이 힘없이 흔들린다. 누가 보면 네가 이 저택 주인인 줄 알았어. 어? 짜증스레 내뱉는 말에 바닐라는 휘트니를 올려본다. 너도 저택 주인이 아니잖아. 저택 주인은 네 아버지 아니야? 조곤조곤 내뱉는 말에 말문이 막혔다. 지나가던 길에 바닐라의 말을 들은 하녀가 크게 놀라더니 고개를 아래에 처박을 것처럼 깊이 숙이고 둘의 뒤를 조용히 지나쳐간다. 휘트니는 바닐라의 말에 퍼석하게 마른 입술을 혀로 훑는다.

“넌 유산 한 푼 못 받고 쫓겨날 애고. 나는 다르지.”

“너라고 다를까.”

“입 좀 다물지?”

“처음부터 멋대로 떠든 건 내가 아니라 너잖아. 휘트니.”

바닐라의 표정은 평온하다. 휘트니는 저 표정을 망칠 수만 있다면 성모마리아에게 침이라도 뱉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손가락을 안으로 말아쥔다. 아주 자연스럽게 손에 힘이 들어간다. 주먹으로 내려칠까. 아니면 정강이를 발로 걷어찰까. 휘트니는 타인을 복종시키는 법이라곤 성적으로 유린하거나, 폭력으로 굴복시키는 것밖에 알지 못했다. 그는 바닐라의 선 얇은 몸을 눈으로 훑는다. 여성의 것처럼 얇고, 가냘픈 몸. 입에 머금고 있던 미소가 더 짙어진다. 넌 꼭 아무것도 안 무서운 것처럼 군다? 정말 아무것도 안 무서운 거야. 아니면 무서움을 느낄 만한 지능조차 없는 거야? 그의 말은 사랑을 고백하는 연인의 것처럼 부드럽고 나긋하다. 바닐라는 그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기는 한 건지 표정 변화도 없이 그를 올려보고 있다.

“멍청한 건 너 같은데, 휘트니.”

“이거 봐. 내가 뭘 할 줄 알고 이렇게 말해. 넌 지능이 좀 부족한 게 분명해.”

“네가 뭘 해도 상관이 없으니까 이러는 거지.”

여기서 네가 뭘 할 수 있는데? 바닐라가 처음으로 웃었다. 휘어진 눈매 사이로 탁한 흰색이 사그라든다. 천장에 달린 조명 빛을 받은 눈동자가 미약하게 반짝인다. 넌 아무것도 못 하잖아. 네 아버지 눈치만 보느냐. 바닐라의 아버지 또한 휘트니와 같은 남자일 텐데 그는 꼭 남인 것처럼 말한다. 그건 오히려 거슬리는 어투였다. 가족인 것을 인정하고 싶지도 않고, 받아들일 생각 또한 없으나 막상 유일한 끈을 부정하듯 말하니 기분이 영 좋지 않았다. 어리숙한 마음에서 비롯된 이기적인 생각이었다. 미간을 찡그린 채로 바닐라를 내려본다. 그와 눈을 맞춘다. 백색의 눈동자 안에 맺힌 남자는 표정을 잔뜩 굳히고 있다. 뭐가 그리도 마음에 안 드는지 눈동자를 옆으로 굴리며 입 벽을 혀로 훑는다.

“내가 틀린 말이라도 했어?”

“닥치지?”

“할 말이 없으니까 욕이나 하는 거겠지. 먼저 건들지 마. 휘트니. 그러면 나도 조용히 있다가 꺼질 생각이니까.”

“너 같이 가져본 게 없던 것들은 말은 항상 잘하더라고.”

“너보단 낫지.”

바닐라의 시선에 휘트니는 입술을 달싹였다. 부정하려면 부정할 수 있었다. 부정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바닐라는 객관적으로나 주관적으로나 휘트니보다 못한 인간이었으니까. 부유하지도 않았고, 남성스러움이라곤 조금도 없었다. 휘트니에게 있어 그럴듯하게 괜찮은 사람의 기준은 제 아비였다. 떡 벌어진 어깨. 선이 굵은 얼굴. 풀을 빳빳이 먹여 주름 하나 없는 양복은 언제나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렇기에 휘트니는 바닐라를 못난 사람이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너 내 애비한테 대주고 저택에 온 거 아니야? 그런 주제에 나보다 낫다는 말이 나와? 실실 쪼개는 휘트니를 보며 바닐라는 고개를 옆으로 기울인다. 드물게 보이는 반응에 괜히 기분이 들뜬다. 나는 적어도 그런 노친네한테 대주진 않아. 바닐라는 단 한 번도 휘트니의 말이 진실이라 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부정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휘트니는 그것이 진실이든, 거짓이든 상관없었다. 바닐라에게 수치심만 줄 수 있다면 그런 사소한 것은 휘트니에게 있어 그리 중요치 않았다. 실실 웃는 휘트니를 보며 바닐라는 눈을 감았다가 뜬다. 긴 속눈썹이 피부에 닿았다가 떨어진다.

“넌 그러고 살면 재미있는 모양이네.”

“뭐?”

“네 말에 따르면 나는 천박한 새끼고, 너는 아주 고귀한 도련님이라는 건데…… 네가 나보다 더 천박하게 굴고 있잖아. 그렇게 사는 게 재미있나 싶어서.”

“야. 생각하고 말해. 너 그러다가, 내가 계단에서 툭 밀면 어쩌려고 그래. 응?”

“그렇게 살면 재미있어?”

바닐라는 정제되지 않은 아주 순수한 의문을 담아낸 말을 내뱉는다. 그의 말에 휘트니는 가장 혐오하는 멍청한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멍하니 눈을 깜빡이고 있다. 저 새끼가 지금, 감히, 나를 비꼬는 건가? 아니, 깎아내리려고 하는 건가? 휘트니는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삶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자기 자신에게 이렇게 대하는 사람을 만난 적이 없었다. 손가락을 안으로 말아 쥔다. 손등에 핏줄이 돋아난다. 휘트니는 처음으로 바닐라의 앞에서 미소를 지웠다. 대신에 그를 내려보다가 등을 돌려 구석의 방에서 벗어난다. 어금니가 서로 부딪치고 비벼진다. 작은 소리가 나고, 거슬리는 감각에 몸이 잘게 떨린다. 하지만 그런 것들보다 더 거슬리는 것은 바닐라였다. 저 빌어먹을 새끼를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괴롭혀야, 어떤 식으로 괴롭게 만들어줘야 나만 보면 벌벌 떨게 될까. 쥐의 사체를 짓밟았던 구두 바닥이 나무에 닿을 때마다 질퍽이는 소리가 났다. 내장 찌꺼기와 부패한 피가 바닥에서 떨어질 때마다 길게 늘어졌다가 툭 끊긴다. 휘트니가 지나간 자리에는 흔적이 남았다. 밑창 모양이 나무에 남는 것을 보던 하녀는 저걸 지워내는 것보다 그들이 모시는 도련님의 기분이 언제 풀릴지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 저택의 원래 주인이 귀가하지 않는 이상, 휘트니는 그들에게 모셔야 할 주인이었다. 휘트니는 변덕스럽고, 폭력적인 주인이었기에 그가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건, 사용인들에게 그리 좋은 소식은 아니었다.

“저 빌어먹을 새끼가.”

휘트니는 그의 위치와는 어울리지 않지만, 모순되게도 휘트니란 사람과는 퍽 잘 어울리는 저속한 욕설을 읊조렸다. 바지 주머니에 넣은 손은 주먹을 쥐었다가 풀기를 반복하고 있다. 아버지는 왜 저런 걸 낳아서. 얌전하거나, 아니면 차라리 계집애거나. 차라리 멍청하기라도 하던가. 아니, 차라리 계집인 게 낫지. 그것을 품에 안고, 취하며, 저열한 만족감에 취해 저리 고깝게 구는 것도 한 번은 참고 넘어갈 수라도 있었을 텐데. 바닐라는 휘트니가 침대에 들일 수 있는 여성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얌전하여 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을 만한 사람도 되지 못했다. 바닐라라는 반쪽짜리 혈육은 휘트니에게 있어, 불순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휘트니는 아주 잠시 걸음을 멈춘다. 잠시 뒤를 돌아본다. 저택에 고용된 사용인들이 바닐라의 방 앞에 쪼그려 앉아 쥐의 사체를 줍고 있다. 물을 잔뜩 먹인 걸레로 바닥을 닦는 하녀의 안색이 창백하다. 아무래도 바닥에 흩뿌려진 살아있던 것의 흔적이 속이라도 안 좋아진 모양이었다. 게워 낼 거면 거기서 게워 내. 응? 다른 곳 가서 먹은 거 다 토하지 말고. 능청스레 내뱉은 말에 하녀의 고개가 아래로 내려간다.

“게워 내지 않겠습니다.”

“게워 내라고 하는 말이야.”

“네?”

“바닐라인지, 뭔지. 저거 마음에 안 드니까. 토하라고 하는 말이라고. 이해 못 하겠어? 이해하게 해줘?”

“아뇨, 아니에요. 도련님. 괜찮습니다.”

“토하라니까?”

비죽 웃으며 하녀를 바라보던 휘트니는 다시 등을 돌린다. 앞으로 나아간다. 뒤에선 하녀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휘트니에게 그리 중요하지 않았고, 휘트니가 신경 쓸 것도 아니었다. 바닐라가 저택에 온 뒤로 휘트니의 모든 신경은 그에게 닿아있었으며, 생각의 시작은 달랐을지 몰라도 끝맺음 만큼은 언제나 바닐라로 마무리되었다. 저걸 어떻게 굴복시켜야 할까. 저거를 어떻게, 수치심을 느끼게 할 수 있을까. 이 저택에서 고개도 못 들고 다니게 하고 싶다. 사생아 주제에. 불순물에 불과한 주제에. 저렇게 당당하게, 뻔뻔하게 걸어 다니는 꼴을 더는 보고 싶지 않았다. 휘트니는 제게 주어진 방의 문을 열었다. 바닐라의 방과 달리 남쪽에 있어 햇볕이 무척 잘 들어오고, 온화한 분위기의 방이었다. 휘트니는 방을 가볍게 훑어보다가 벽면에 시선을 두었다. 벽에는 여러 개의 엽총이 걸려있다. 태생적으로 온화한 성정의 사람들과 달리 휘트니는 타고나기를 거칠었고 천박한 폭력을 가장 친밀한 친우처럼 곁에 두는 사람이다. 그걸 진즉에 눈치챈 그의 부모는 그 폭력성이 사람에게 닿지 않고 차라리 들짐승에게 향하길 바라며 생일마다 선물해 준 사냥용 엽총은 잘 손질되어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사냥 약속을 잡는 게 좋겠네.”

휘트니의 발이 엽총이 빼곡하게 걸려있는 벽으로 향한다. 휘트니는 그중 가장 아끼고 자주 손질하는 총 한 자루를 손에 쥐어 들었다. 성년을 앞둔 나이라며 아버지가 직접 선물해준 그 총. 총구를 바닐라에게 들이밀면 그 새끼의 낯짝이 조금은 굳어지지 않을까. 휘트니의 머릿속은 정제되지 못한 순수한 악의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손에서 총을 놓지 않은 채로 창문 밖, 너머의 풍경을 눈에 담는다. 푸르른 잎, 다양한 색의 유약한 꽃. 아름다운 것으로만 가득 찬 정원 너머에는 드넓은 숲이 있다. 그곳에는 들짐승들이 존재한다. 사슴, 멧돼지, 꿩. 토끼. 무척 많은 들짐승이 살아가는 터전에서 총소리가 몇 번 나는 것쯤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휘트니의 입술 끄트머리가 위로 올라간다. 비뚜름한 미소가 그의 얼굴에 그려진다. 저것한테 겁이라는 걸 알려줘야겠다. 반쪽짜리 형일지라도, 피가 반밖에 섞이지 않았을지라도. 바닐라에게 있어 이 저택 안에 유일한 혈육은 자신밖에 없으니. 그걸 알려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휘트니밖에 없었다. 사생아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사생아의 위치란 무엇인지. 사생아인 바닐라가 얼마나 많은 것을 누리고 있는 건지. 휘트니는 알려줄 생각이었다. 그의 아버지이자 바닐라의 아버지인 남자가 제게 준, 이 엽총 한 자루로.

 

 

 

 

“사냥해 본 적 있냐?”

휘트니는 사냥할 때마다 입는 옷을 입은 채로 총을 어깨 위에 얹고 있다. 바닐라는 그의 옆에 서서 총 하나 들지 못한 채로 숲의 입구에 눈을 두고 있었다. 해본 적 있겠어? 생각을 좀 해보고 말해. 짜증스레 말하는 바닐라에 휘트니는 처음으로 화나지 않았다. 그저 우스웠다. 자기가 무슨 일을 당하게 될지도 모를 텐데. 저 정도는 형님으로서 이해해 주어야지. 휘트니의 옆으로 그가 키우고 있는 말이 멈춰 선다. 마부는 고삐를 잡은 채로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있다. 그들을 고용한 자의 모든 걸 상속받게 될 도련님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지 않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사냥도 안 해보고 뭐 했어?”

“보태준 거 있어?”

“없으니까 이렇게 말하는 거잖아.”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는다. 마부는 둘의 눈치를 보다가 겨우 입을 떼어낸다. 도련님, 슬슬 말에 타시는 건……. 그의 말에 휘트니가 고개를 돌린다. 마부와 시선을 맞추자 남자는 눈을 아래에 둔다. 할 말 있어? 휘트니가 묻자 마부는 다급히 고개를 젓는다. 아닙니다. 도련님. 주제넘게 말씀드린 점, 사과드립니다. 잘게 떨리는 목소리는 지금 그가 얼마나 큰 불안에 떨고 있는지 증명해주는 듯했다. 휘트니는 마부를 바라보다가 능청스레 웃으며 남자의 어깨를 툭툭 두드린다. 안 잡아먹어요. 응? 내 말 관리해주는 사람인데. 뭐라고 하거나, 뭘 하면 안 되지. 그렇죠? 휘트니의 말은 끊기거나 걸리는 부분 없이 유려하기 그지없었다. 마부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네, 그렇죠. 도련님. 도련님의 말씀은 언제나 지당하십니다. 엉성하기 짝이 없는 웃음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린다. 그는 바닐라와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다. 숲의 입구에는 빛이 드문드문 내려앉아 있었다.

“야. 넌 말이 없으니까, 그냥 걸어도 괜찮지?”

“그냥 안 가고 싶은데.”

“그렇게는 안 되고.”

“그러면 총이라도 주던가. 그것도 안 줬는데 사냥을 어떻게 해.”

“네 몫의 총이 없으니까 당연히 못 주지.”

“네가 들고 있는 총은 뭔데.”

“이건 내 거야, 멍청아. 나는 총이 있으니까 들고나온 거겠지. 혹시 지능이 다른 사람보다 부족하기라도 해? 그런 거라면 차라리 말하지 마.”

“너보단 똑똑해, 휘트니.”

바닐라는 오늘도 한 마디를 지는 법이 없었다. 휘트니는 지금은 바닐라의 시건방진 말을 유하게 넘어 가주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숲으로 들어가면 바닐라는 공포에 떨게 될 것이다. 인간이란, 태연한 척 굴려고 해도 목숨을 위협받으면 두려움에 떨기 마련이었다. 휘트니는 총대를 고쳐 쥔다. 그는 꽤 보기 좋게 웃으며 제게 주어진 말에 올라탔다. 슬슬 가자. 네가 만약 꿩이든, 토끼든, 숲에 사는 들짐승을 뭐라도 하나 잡는다면 내가 받았던 총 중 하나를 줄게. 마치 성격이 좋고 유한 도련님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한다. 바닐라는 휘트니의 말에 온갖 인상을 다 쓰며 헛구역질할 것처럼 굴었다. 쥐약이라도 먹었어? 갑자기 왜 이래. 하던 대로 해. 휘트니, 너 때문에 속이 안 좋아. 휘트니는 마부에게서 고삐를 받아 들고 말을 끌었다. 말은 휘트니가 원하는 대로 숲을 향해 느리게 걸어가고 있다. 입마개를 한 하운드는 꼬리를 살살 흔들며 그 뒤를 따라 걸었다. 바닐라는 내키지 않는다는 걸 감추지도 않고서 숲을 향해 걸어갔다.

“사용인분들은 안 데리고 가?”

“있으면 거슬려. 마나는 총소리만 들리면 꺅꺅거린다고.”

“보통 총소리가 들리면 소리 지르는 게 정상이야.”

“그러면 넌, 소리 질러?”

“나는 안 지르지.”

“너도 비정상이네.”

“휘트니. 내가 너보단 덜해.”

여러 마리의 하운드가 꼬리를 흔들며 땅에 코를 처박고 있다. 그중 한 마리는 컹컹 짖으며 앞장서 걷는다. 휘트니는 말의 고삐를 잡아끌거나, 말의 다리를 툭툭 치며 하운드가 이끄는 대로 향했다. 어디까지 가는 건데. 숲 입구에 내려앉아 있던 빛은 안으로 들어갈수록 점차 희미해지더니 곧 완전히 사라져갔다. 휘트니는 말에서 내리지 않은 채로 말한다. 여기는 생각보다 들짐승이 없어.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가야 있지. 아무렇지도 않게 뻔뻔스럽게 거짓을 입에 담는다. 바닐라는 저택 뒤편에 있는 숲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했기에 휘트니의 말을 의심스럽게 여기긴 했으나, 완곡하게 부정하지는 못했다. 어떤 동물이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아주 조금도 알고 있는 게 없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바닐라는 휘트니를 흘겨보면서도 입에는 침묵을 머금고 있었다.

“야. 넌 왜 애가 귀여운 맛이 없냐?”

“난 너랑 나이가 같아. 휘트니.”

“허이고. 노친네. 기운도 좋지. 여기서도 씹질하고, 거기서도 씹질을 하네.”

야, 그만. 그만 가. 고삐를 쭉 당기자, 말이 천천히 멈춰 선다. 휘트니는 퍽 능숙하게 말에서 내렸다. 바닐라의 미간이 좁아진다. 야. 여기에 뭔 동물이 있어. 토끼 한 마리도 안 보이는데. 바닐라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말한다. 그러자 휘트니는 엽총을 고쳐 매고선 이죽거린다. 동물이 왜 없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다. 그의 물음에 바닐라는 고개를 옆으로 기울인다. 무슨 동물이 있다는 건지……. 주위가 고요했다. 작은 동물이 뛰어다닐 때마다 밟힌 나뭇잎이나 나뭇가지가 바스러지는 소리도, 그것들의 울음도, 하다못해 작은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모든 것이 고요했다. 아스라이 멀리 호수가 있는 건지 바람이 불어올 때면 물소리가 났고, 이따금 말이 가쁜 숨을 내뱉으면 그것이 그나마 존재하는 소리를 살라 먹었다. 근처에 있는 동물이라곤 휘트니가 타고 온 말과 얌전히 앉아 있는 하운드 몇 마리뿐이었다. 저것도 동물이긴 한데…… 설마 저걸 사냥한다고 말하는 건가?

“하운드를 풀어두고 사냥하려는 거야?”

“미쳤어? 얘네는 내가 새끼 때부터 키운 자식 같은 개새끼들이라고.”

“혹시 말을 사냥하려는 건 아니지?”

“멍청한 거야. 생각을 안 하는 거야?”

“여기에 무슨 동물이 있는데.”

“있잖아, 동물.”

휘트니의 검지가 바닐라에게 향한다. 바닐라는 휘트니의 말을 이해하는 데에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동물? 누가? 휘트니의 손가락은 바닐라를 가리키고 있다. 그의 눈동자 속에 맺힌 존재 또한 바닐라였다. 눈을 느리게 감는다. 그리고 다시 뜬다. 색이 옅은 금색의 머리카락이 미약한 빛을 받을 때마다 부서지는 포말처럼 반짝인다. 불어오는 바람에 머리카락이 허공에 넘실댄다. 그 틈새로 보이는 색 옅은 하늘색 눈동자. 바닐라의 입술이 조금 벌어졌다가 다시 맞붙는다.

“나?”

“응, 너.”

매고 있던 총을 든다. 총구를 바닐라에게 겨눈다. 휘트니는 바닐라가 어떤 표정을 보일지 무척이나 기대되어 참을 수가 없었다. 겁을 먹어 몸을 잘게 떨까? 아니면 낯이 파리하게 질려있을까. 무릎을 꿇고 비굴하게 목숨을 구걸하는 꼴이 보고 싶었다. 입술의 끄트머리가 위로 올라간다. 눈두덩이 위로 내려앉은 머리카락 사이로 바닐라가 보인다. 바닐라는 휘트니가 상상한 모든 것을 완곡하게 부정하고 있었다. 어이가 없다는 듯 웃고 있는 바닐라에 휘트니는 미간을 좁혔다. 뭘 그렇게 실실 쪼개? 짓씹듯 내뱉은 말에 바닐라는 휘트니와 눈을 맞춘다.

“쏴봐.”

“제정신이 아니네.”

“쏠 수나 있으면, 쏴 보라고.”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그렇게 말하는 거야?”

“네가 날 못 죽일 테니까.”

네 아버지 때문에. 네가 가진 걸 다 잃을 수도 있으니까. 못 쏘겠지? 웃음기가 뒤섞인 목소리에 검지를 방아쇠에 얹는다. 너 하나 죽는다고, 너 같은 천박한 사생아 하나 죽는다고. 바닐라가 죽는다고 한들 달라질 건 없다. 휘트니는 여전히 그 고풍스러운 대저택 안에서 도련님으로 존재할 것이고, 그에게 주어져 누리고 있는 그 모든 것들은 변치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로 그럴까? 확신에 가까운 믿음 속에서 아주 작아 눈치채지 못하던 의심 하나가 피어난다. 희고 단단한 이로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어댄다. 너 같은 거 죽어도, 그 새끼는 눈 하나 깜짝 안 할걸.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리지 않도록 부단히 신경 썼다. 휘트니는 더 이상 그가 내뱉는 말에 완벽하게 확신할 수 없었다.

“쏴. 휘트니.”

바닐라는 총을 단 한 번도 발포해 본 적이 없는 사람도 맞출 수 있을 정도로 미동도 없었다. 방아쇠를, 당기기만 하면 됐다. 검지에 힘을 주고 누르기만 하면…… 저 평온한 낯짝이 일그러지거나 창백하게 질리는 걸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왜 나는 손에 힘을 줄 수 없는 걸까. 휘트니의 손가락 끄트머리가 잘게 떨리고 있다. 그 모습에 바닐라는 배를 감싸 쥔다. 하하하, 하하하! 너 지금 엄청나게 모자라 보이는 거, 알아? 바닐라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진다. 부드럽게 휘어진 눈매 속, 회색이 사그라든다. 미약한 빛을 받을 때면 반짝이는 눈동자. 그 안에 있는 휘트니의 표정은 그리 좋다고 할 수 없었다. 그의 예상이나 바램과는 달리 마치 두려움에 떠는 사람처럼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은 바닐라가 아닌 휘트니였다. 두려움이나 불안은 그의 삶에 어울리지 않는 감정이자 단어였었다. 지금은? 마른침을 식도 뒤로 삼킨다. 씨발. 야. 나 쏠 수 있거든? 너 같은 거. 너 같은 새끼 하나 죽는다고……. 방아쇠에 얹어진 검지에 힘을 준다. 총구는 바닐라에게 겨누어져 있다.

“말을 쓸데없이 길게 하는 거 아냐?”

그 말에 휘트니는, 방아쇠를 당겼다. 자세는 어정쩡했고 그 탓에 몸이 휘청였다. 반동을 이기지 못하여 어깨가 욱신거렸다. 손에 들려있던 엽총은 바닥으로 떨어진다. 놀란 말은 울며 몸을 뒤틀었고, 하운드들이 컹컹 짖어댔다. 그 혼잡스러운 상황 안에서 휘트니는 땅으로 떨어진 총을 주우려고 하지 않았다. 대신에 반쯤 뜨인 눈으로 바닐라를 바라보았다. 바닐라의 어깻죽지에서 피가 질질 흐르고 있었다. 그는 어깨를 손으로 감싸고서 비틀거리며 휘트니에게 다가간다. 정확히 말하자면 휘트니가 떨어트린 엽총을 향해 걸었다. 상체를 숙인다. 통증 때문일까. 아니면 동물들이 자아내는 울음소리에 정신이 없는 탓일까. 바닐라는 몇 번이나 앞으로 고꾸라질 뻔했다. 그는 비틀거리면서도 엽총을 주워들었다. 휘트니는 그걸 보고, 저도 모르게 근처에 있는 나무 뒤로 숨고 말았다.

“숨는 거야?”

너는 나를 쐈으면서, 나는 안 돼? 총을 든 모습이 너무나 어정쩡했다. 우습게 보이기도 했다. 처음 총을 쥔 사람이 보일 법한 자세에 불과했는데 되려 그것이 공포를 자아냈다. 처음이란, 예측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예측할 수 없는 것이야말로 휘트니가 가장 경계해야 하며 두려워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손가락을 안으로 말아쥔다. 가쁜 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살짝 내민다. 바닐라는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휘트니. 어디 있어. 너는 쏴도 되고, 나는 안 된다고 하는 건. 치사하잖아. 응? 그의 목소리는 평온하기 짝이 없었다. 마치, 아침 인사를 건네는 것과 같다. 마주 보고 식사할 때, 어젯밤에 뇌 위에 내려앉은 꿈을 늘어두거나 하루에 대해 떠드는 사람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총 쏴본 적도 없으면서 괜찮겠어? 응? 형으로서 한 번 알려줄까?”

허세를 부리며 내뱉은 말에 바닐라는 낮게 웃는다. 네가 무슨 형이야. 휘트니. 하는 꼴을 보면 나보다 훨씬 나이가 어린 애 같은데. 느리게, 부드럽게, 아이를 달래는 것처럼 한없이 유약한 투로 말한다. 바닐라는 휘트니가 뒤에 있는 나무를 총으로 겨누고 있다. 그가 조금이라도 나오면, 같은 곳에 총알을 박아 넣을 생각이었다. 똑같이. 자신의 기분을 느낄 수 있도록. 그리고 똑같이 되돌려준다는 걸 알게 해서 다시는 손댈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나와, 휘트니. 나무 뒤쪽에서 작은 소리가 났다. 마른풀이 짓밟히고,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 바닐라는 그 소리를 따라 발을 옮긴다. 느린 걸음이었다. 말은 울다가 숲의 깊숙한 곳으로 뛰어갔고, 하운드는 여전히 컹컹 짖으며 바닐라를 뒤따라 걸었다. 땅에 코를 처박은 채로 킁킁대며 냄새를 맡고 있다. 꼬리를 흔들며 바닐라의 앞으로 나아가더니 앞질러 걷는다. 휘트니는 그 모습에 마른세수를 연거푸 했다. 씨발. 빌어먹을 개새끼들이. 죽이지 않고 키워준 게 누군지도 모르는 것처럼 굴고 있어. 저택으로 돌아간다면 저것들의 명을 끊을 것이다. 총으로 하나하나 쏴 죽여서, 그리고 가죽을 벗기고……. 휘트니가 바닐라를 살피기 위해 고개를 살짝 내미는 순간, 총알이 나무를 스쳐 지나갔다. 큰 소리에 하운드의 울음이 더 거칠어지고 빨라졌다. 아랫입술을 이로 잘근잘근 씹어댄다.

“그렇게 생긴 주제에 달려있긴 한 모양인가 봐?”

“할 말이 없으니까 성희롱부터 하는 말버릇은 고치는 게 좋아.”

네 아버지도 싫어하실걸. 그런 건. 휘트니의 손톱과 살 사이, 아주 작은 틈새에 흙이 묻어난다. 저 새끼가 또…… 또! 남의 아버지를 걸고넘어지고 있어. 잘 알지도 못하는 주제에. 나보다 더 오랜 시간을 보내지도 않은 주제에. 뭘 안다고. 뭘 알고 있다고. 잘난 듯이 처 말하고 있어. 총을 놓치고 숨어버린 자기 자신에 짜증이 났다. 총을 가져왔어야 했는데. 총을 놓쳐서는 안 됐는데. 풀을 잔뜩 먹여 주름 하나 지지 않았던 셔츠에 얇은 선이 몇 개 생겼다. 그가 아끼던 사냥복에 흙먼지가 묻어났다. 작은 자갈에 살이 눌려 미약한 통증이 일었다. 크기가 적당한 돌을 손에 쥔다. 총이 없었기에 던질만한 것이 돌밖에 없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별수가 없었다. 상체를 내밀어 손을 움직인다. 내던져진 돌은 바닐라의 머리에 맞았다. 그 작은 머리가 옆으로 꺾인다. 작은 체구가 비틀, 비틀거리며 바닥에 툭 쓰러진다.

“그깟 돌 하나도 못 피하는 주제에!”

휘트니는 뭐라도 된 것처럼 몸을 숨기고 있던 나무의 밖으로 나온다.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은 채로 바닐라를 내려본다. 이죽거리며 바닐라의 작은 체구를 눈에 담는다. 네가 총을 들어봤자, 넌 아무것도 못 해. 이 멍청한 년아! 기세등등해진 자세와 커진 목소리에 바닐라는 바닥에 엎드린 채로 웃는다. 아까처럼 바닐라와는 어울리지 않는 크고 호탕한 웃음소리였다. 휘트니의 웃음이 점차 잦아든다. 웃음과 비난, 비꼼이 뒤섞인 말을 내뱉던 입술이 서로 맞닿기 시작한다. 총구가 겨누어졌다. 바닐라는 얼굴을 적시는 피를 닦아낼 생각도 하지 않고 휘트니처럼 이죽대고 있었다.

“병신.”

검지가 방아쇠를 당긴다. 총구는 휘트니의 머리에 향해있지 않았다. 팔과 어깨를 연결하는 곳. 그곳에 닿아있다. 휘트니는 그가 가장 혐오하고 무시하는 멍청한 인간이 된 것처럼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총알이 휘트니를 향해 날아온다. 그것은 휘트니의 어깨를 꿰뚫고 빽빽이 자라있는 나무에 박혔다. 손으로 어깨를 감싼다. 상체가 아래로 굽어진다. 아, 씨이, 발……! 벌어진 입술 틈새로 신음과 거친 욕설이 새어 나왔다. 난생처음으로 겪어보는 아득한 통증에 손가락 끄트머리가 잘게 떨린다. 빌어먹을 년이. 저 씨발, 미친 새끼가. 어깨에 생긴 상처에서 흘러내리는 피. 그것은 한없이 희기만 하던 셔츠를 축축하게 적신다.

“쏠 수 있다고 했잖아.”

총을 높게 들어 올린다. 휘트니는 바닐라가 뭘 할지 감도 잡을 수 없었다. 그는 주춤주춤 뒤로 물러선다. 바닐라는 한 걸음씩 휘트니에게 다가간다. 당하면 꼭 똑같이 돌려줘야 하는 거 알아? 빈민촌은 그래. 덜하면 겁을 안 먹고, 더하면 원한만 사거든. 조곤조곤 내뱉는 말은 휘트니가 알던 세상과는 거리가 한참은 멀었다. 바닐라를 바라보며 뒷걸음질 치던 탓에 땅에 박혀있던 돌을 보지 못했다. 휘트니의 몸이 뒤로 기운다. 이런, 씨발. 볼품없이 넘어진 휘트니의 발치에 선 바닐라는 그를 내려보고 있다. 감정이 담기지 않은 회색의 눈동자, 안구 위에 얹어진 망막에는 휘트니가 맺혀있다. 더도, 덜도 아니고. 딱 네가 나한테 한 것만 돌려줄게. 딱, 그 정도만 돌려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 휘트니는 그 자신이 바닐라에게 저지른 일을 떠올린다. 휘트니는 제가 행한 모든 것들이 불청객에 가까운 바닐라가 모두 참고 감당해야 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 믿음은 지금까지도 가늘고 길게 이어지고 있다.

“눈, 감는 게 좋을걸?”

바닐라는 열기가 식지 않은 총구를 손에 쥔다. 하얗던 피부가 발갛게 달아오른다. 바닐라의 미간이 홧홧한 열기와 아릿한 통증으로 인해 좁아진다. 휘트니는 바닐라의 표정을 바라보다가 그의 손에 들린 엽총을 보았다. 바닐라는, 엽총의 뒤편을 휘트니에게 가까이하고 있다. 뭐 하려고. 병신아. 총은 쏘라고 있는 거야. 알아? 바닐라의 입술 끄트머리가 위로 올라간다. 아무래도 나는 총이 조금 안 맞는 모양이야. 손가락을 떼어낼 때마다 얇은 피부가 총구에 들러붙어 찢어진다. 바닐라는 그 감촉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총을 내다 버리고 다시 저택으로 돌아갈 생각은 없었다. 인내에는 끝이 있고, 참는 것에도 한계가 있는 법이었다. 길게 땋아 내린 머리가 아래로 툭 떨어진다. 휘트니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나는 꽤 많이 참아줬다고 생각해, 휘트니.”

“그건 내가 할 말이야. 병신아.”

“정말 그래?”

네 아버지에게 맹세코, 네 아비가 믿는 신에게 맹세코 그렇게 말할 수 있어? 마른 입술을 혀로 훑는다. 휘트니는 신을 믿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버지를 그렇게 사랑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기에 휘트니는 맹세할 만한 존재가 없었다. 거짓을 내뱉는 건 무척이나 쉬운 일이었다. 그러나 내뱉고 싶지 않았다. 바닐라를 위해서가 아니었다. 이것은 휘트니, 본인을 위한 일이었다. 거짓으로라도 바닐라의 앞에서 거짓으로 아끼는 존재를 만들어 그것에 맹세하는 건, 배를 뒤집어 까고 패배를 인정하는 꼴이 될 것만 같았다. 휘트니는 맹세하는 대신에 이죽거렸다. 마치 바닐라를 비웃듯이 이 상황에 놓인 자기 자신을 무시하듯이 실실 쪼개며 손톱으로 땅을 긁어댔다.

“꺼져.”

바닐라는 여전히 휘트니에게 있어 이 저택 속에 존재해서는 안 될 불순물과 같은 존재였다. 이방인이자, 불청객이었고, 그런 존재에게 패배를 인정하는 것은 휘트니답지 않았다. 그의 눈매가 휘어진다. 그의 어미를 쏙 닮은 하늘색이 더욱 색 짙어진다. 바닐라는 그의 얼굴을 내려보며 시큰둥하게 말했다. 아, 그래? 휘트니, 내가 지금 문득 생각한 건데……. 바닐라의 손에 들린 총이 더 높이 올라간다. 동시에 휘트니는 혀를 깨물지 않도록 이를 맞대었다. 너는 내 생각보다 훨씬, 멍청한 거 같아. 눈을 질끈 감는다. 바닐라의 웃음소리가 귓등을 간질였다. 죽지는 않을 거야. 휘트니. 네가 날 죽이지는 않았으니까. 바닐라의 말이 끝나고, 숲에서 크다면 크고 작다면 작은 타격음이 들렸다.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 같기도 했다. 나뭇가지 위에 앉아 있던 새가 푸드덕거리며 하늘로 날아오른다. 하운드가 짖어대는 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온다. 그 사이로 바닐라의 낮은 웃음이 묻어난다. 이마와 뺨이 뜨겁고 축축했다. 눈이 계속 감겼다. 통증을 이기지 못한 탓인지 입술을 벌릴 때마다 앓는 소리가 났다.

“자고 일어나면 저택일 거야.”

마음 같으면 버리고 가고 싶은데. 네가 없어지면 사용인들이 이 숲을 헤집고 다녀야 하니까. 그 사람들도 불쌍하지. 너 같은 걸 도련님이라고 모셔야 하잖아. 아, 불쌍해라. 아, 불쌍해. 바닐라의 목소리는 가느다랗다. 금방이라도 끊길 것 같았지만, 끊어지지 않았다. 손등이 흙에 쓸리는 감촉이 덧없이 불쾌했다. 그보다도 더 불쾌한 것은 자신이 바닐라에게 끌려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넌 살 좀 빼야겠다. 무거워. 불어오는 바람이 축축하고 미적지근했다. 어쩌면 곡선이 진 이마를 타고 흐르는 피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눈이 서서히 감긴다. 흐릿한 의식을 강하게 쥐어 잡은 채로 휘트니는 겨우 입을 떼어냈다. 다음에는 꼭, 네 대가리를 쏠 거야. 뇌수를 터트려서…… 바로 그 자리에서 죽도록…… 나한테, 감히, 이딴 짓을 할 생각도 하지 못하도록…… 그냥 죽여버릴 거야……. 띄엄띄엄 내뱉는 말에 매가리가 없었다. 바닐라는 그의 말에 크게 웃음을 터트린다. 그 전에 내가 널 죽여야겠네, 그러면. 나는 죽을 생각이 전혀 없어. 휘트니. 당겨진 옷깃이 목을 죄었다. 바닐라를 따라 걷는 하운드들은 꼬리를 흔들며 휘트니의 뺨을 핥거나 그의 신발에 코를 대고 킁킁댔다. 휘트니는 멀어져가는 의식 속에서도 생각했다. 저택으로 돌아가면 저 빌어먹을 개새끼들의 머리를 따버려야겠다고.

 

 

 

 

휘트니가 눈을 뜬 것은 하루가 지났을 때였다. 아침과 오후의 애매한 경계 속에서 눈을 뜬 휘트니의 곁에는 그를 어릴 때부터 모시던 늙은 하녀가 서 있었다. 도련님, 일어나셨네요. 온화하게 웃으며 다정하게 내뱉는 말에 그는 머리를 헝클이며 겨우 상체를 일으켰다. 온몸이 찌뿌둥했다. 머리는 욱신거렸고, 입안은 흙이라도 먹은 것처럼 꺼끌꺼끌했다. 할멈. 그 새끼 지금 어디 있어. 그의 물음에 하녀는 방의 입구를 막고 있는 문을 눈에 담는다. 바닐라 도련님께서는 지금 방에 계시지요. 휘트니 도련님. 바닐라 도련님께 잊지 않고 감사 인사를 전하는 게 좋겠어요.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에 그는 미간을 찡그린다.

“감사? 무슨 감사.”

“멧돼지에 치여 기절한 도련님을 이 저택까지 데려온 것이 바닐라 도련님이지 않나요.”

“그 새끼가 그렇게 말하디?”

“네. 그랬습니다만.”

차마 진실을 내뱉을 수 없었다. 진실을 말한다고 한들 하녀가 휘트니를 비웃을 리가 없었지만, 말을 내뱉는 순간 한 번도 타인에 의해 망가진 적 없는 자존심이 형태를 잃게 될 것만 같았다. 아랫입술을 짓씹다가 다시 침대에 눕는다. 내가 알아서 할게. 아침이나 가져와. 퉁명스레 내뱉은 말에 하녀가 입을 가리고 작게 웃는다.

“아침은 휘트니 도련님께서 좋아하는 브리오슈와 소고기 스튜를 가져오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던가.”

“아프신 곳이 있다면 부디 말씀해주세요. 의원을 부를게요.”

아픈 곳은 많았다. 이를테면 총알이 꿰뚫고 간 어깨. 질질 끌려다닌 탓에 거친 땅에 마찰된 등. 엽총의 뒷부분에 내려 찍혀져 찢어진 이마. 하나씩 세면 끝이 없었고, 끝이 없었기에 그걸 말하지 않았다. 최악의 기분이었다. 어미의 자궁 속에 만들어져, 낳아지고, 지금까지 자라면서 이렇게 불쾌한 적은 살아생전 처음이었다. 하녀는 등을 돌려 문 쪽으로 걸어간다. 문손잡이에 손을 올렸다가 아, 하더니 고개를 돌린다.

“그러고 보니, 바닐라 도련님께서 휘트니 도련님께 전해달라고 하신 말씀이 있었어요. 지금 전달해 드려도 될까요?”

감고 있던 눈을 느리게 뜬다. 문을 등진 채로 선 하녀가 고개를 옆으로 기울인다. 휘트니는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떼어낸다. 걔가 뭐라고 했는데. 미안하다고 하던? 상체를 겨우 일으켜 침대 등받이에 몸을 기댄다. 하녀는 의아한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지만, 휘트니에게 직접 이유를 묻지 않았다. 어떨 때는 쓸데없는 말을 발설하지 않고, 침묵이 가장 친밀한 친우처럼 구는 것이 이 저택에서 오랫동안 지낼 수 있는 방법이었다. 하녀는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있다. 그녀는 휘트니가 말을 꺼내기 전까지 입을 벌릴 생각이 없는 듯했다.

“아, 됐어. 뭐라고 했는지 말하고 나가.”

“휘트니 도련님께 다음에 또 사냥을 나가자고 하셨어요.”

“걔가?”

“네. 바닐라 도련님께서요. 그리고, 선물해 준 것도 고맙다고…….”

시녀의 말에 휘트니는 벽으로 시선을 돌린다. 마치 아주 귀중한 보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가장 소중한 물건인 것처럼 수집하듯 걸어두었던 수많은 총 중, 그가 어제 들고 나갔던 엽총이 보이지 않았다. 이미 없다는 걸 확인했음에도 휘트니는 계속해서 총의 수를 세었다.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이런, 씨발. 빌어먹을 새끼가. 햇볕을 잔뜩 받아 보송보송한 이불이 그의 손에 의해 구겨진다. 하녀는 그런 휘트니를 눈치채지 못한 듯 온화하게 웃고 있다. 정말, 다행이에요. 건방진 걸 알고는 있으나, 걱정했답니다. 두 분께서 사이가 좋지 않은 채로 오랜 시간이 지나면 어쩌지, 하고요. 조곤조곤 말하는 하녀를 흘겨본다. 그녀의 목소리는 휘트니의 귓등에도 닿지 못했다. 휘트니의 머릿속은 그 빌어먹을 바닐라로 가득 차 있었다. 그걸 죽여야 했는데. 그거를 그냥, 망설이지 않고 죽여버려야 했는데! 입안의 여린 살을 이로 씹어댄다. 얇은 피부가 짓 씹히고, 살이 갈라지며 묽고 비린 피가 혀에 묻어난다. 하녀가 해사하게 웃는다. 눈가의 주름이 자글자글했다. 빛을 받은 그녀는 휘트니와 달리 무척이나 행복해 보였다.

“오늘따라 말이 길었습니다. 죄송해요, 도련님.”

“……늙으면 다 그렇지. 못 들은 거로 해줄게. 나가.”

“그렇네요. 늙으면 다 이리되는 걸까요.”

낮지만, 그리 거칠지 않은 웃음소리를 남기고서 하녀는 휘트니의 방에서 나갔다. 그녀가 나간 방 안에는 미적지근한 온기를 머금은 빛이 내려앉아 있다. 열린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바람, 그 바람에 의해 나풀대는 얇은 커튼. 휘트니를 제외한 모든 것이 평화로웠다. 뺨을 타고 차게 식은땀이 아래로 흘러내린다. 죽여버릴걸. 어깻죽지를 쏘는 게 아니라, 그 작은 머리를 쏴서 뇌수가 흩뿌려지고 하운드들이 그걸 주워 먹게 할걸. 괜히 망설여서. 쓸데없는 생각을 길게 해서…….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사람을 쏘는 게 처음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불안해하고, 겁먹어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휘트니에게 주어진 유일한 기회는 휘트니에 의해 불발됐다. 고개가 점차 아래로 내려간다. 손을 올려 결 좋은 머리카락을 억세게 움켜쥔다. 머리카락을 움켜쥐던 손에 뺨에 닿는다. 마른세수를 연거푸 하며 눈을 깜빡인다. 손가락 틈새로 그림자가 내려앉은 흰 이불이 보였다.

“빌어먹을 새끼.”

짓씹듯 말한다. 휘트니가 할 수 있는 건 고작 이것밖에 없었다. 바닐라를 생각하고, 바닐라가 있지도 않은 방에서 그를 향한 욕설을 내뱉는 게 전부였다. 손등에 힘줄이 돋아난다. 맞닿은 어금니가 갈린다. 휘트니는 결국 이불을 걷어내고 침대의 아래, 차가운 바닥 위로 발을 내디뎠다. 매일 신고 다니는 가죽 구두를 신을 생각도 하지 않고서 맨발로 방 밖으로 나온다. 먼지가 잔뜩 내려앉은 카펫이 발바닥에 닿을 때마다 조금 간지러웠고, 이따금 따갑기도 했다. 복도를 부산스럽게 걸어 다니던 하녀나 하인들은 휘트니를 보고 고개를 숙이다가도 그의 맨발을 보고 당황하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도련님. 그러다가 감기에 걸리세요. 열병이라도 앓으시면……. 걱정이 담긴 말은 휘트니의 귀에 닿지 못했다. 되갚아 주고 싶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되갚아 주는 시늉이라도 해야 많은 것이 더 망가지지 않은 채로 보존될 것만 같았다. 손톱이 손바닥의 얇은 피부에 파고든다. 그 얄팍한 통증은 온몸에 뿌리를 내린 고통에 살라 먹혀 곧 종적을 감추었다.

휘트니는 바닐라의 방 앞에 선다. 주먹을 쥐고서, 원목으로 만들어진 문을 강하게 두드린다. 야. 바닐라. 안에 있는 거 다 알거든? 문 빨리 처 열어! 큰 소리가 복도 안을 가득 메웠다. 사용인들은 휘트니의 행동을 만류하지 못하고 멀찍이서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단단한 나무를 세 번째로 두드렸을 때, 문이 열렸다. 그 틈새로 회색의 머리카락이 보였다. 창백한 피부, 미약하게 반짝이는 눈동자. 휘트니의 시선은 바닐라의 얼굴에서 얇은 목으로, 목에서 둥글고 좁은 어깨로 서서히 내려간다. 휘트니의 눈이 바닐라의 손에 닿는다. 그는 엽총을 들고 있었다. 엽총의 끄트머리에는 휘트니의 피가 말라붙어 있는 채였다. 왜 그래, 휘트니. 바닐라의 어투는 평온했다. 그렇기에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이 이질감을 느끼는 것은 오로지 휘트니, 그뿐이다. 입이 마른다. 문을 두드리는 것과 달리 그가 말을 고르고 있자, 바닐라의 입술이 옅은 호선을 그렸다. 그는 부러 총을 들어 올려 보인다.

“고맙다는 말은 안 해도 돼.”

총구가 문밖으로 조금 튀어나왔다. 그 끝이 휘트니의 복부에 닿는다. 난 이미 많이 받았으니까. 바닐라의 시선이 휘트니에게 닿는다. 휘트니는 바닐라의 망막 속에 맺힌 제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 시선을 그의 입술에 두었다. 이유는 명확했다. 알고 싶지 않아서. 그 눈동자에 담긴 자신을, 내가 짓고 있을 표정을…… 알고 싶지 않았기에. 휘트니는 바닐라의 입술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얇고 작은 입술이 느리게 벌어진다. 그것은 무슨 말을 자아냈지만, 소리를 내지는 않았다. 휘트니는 그 모양을 좇아 머릿속으로 홀로 발음해본다. 꺼, 져. 알아듣지 못할까 봐 아주 친절하게 몇 번이나 같은 모양을 반복해주는 모습에 휘트니는 총구를 감싸 잡았다. 입을 맞출 것처럼 얼굴을 가까이한다. 말라붙은 살점이 떨어지지 않은 총구의 겉은 우둘투둘하고 거칠었다.

“다음에 또, 숲으로 사냥 같이 가.”

뒷말을 겨우 삼킨다. 진짜, 죽여줄 테니까. 그때는. 짤막하기 짝이 없는 말이 그렇게 내뱉기 힘들었다. 휘트니는 그 이유를 머릿속에서 지워내기 위해 입술의 끄트머리를 위로 올려 웃었다. 바닐라는 휘트니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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